손오공이 돌아왔다<8>

칠산 묘법연화서 법지

   서유기는 어리석은 마음을 지닌 손오공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은 정말 가관입니다. 마음의 수양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은 탓에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습니다. 손오공은 일흔 두 가지 온갖 변화 술법을 이용하여 천계와 하계, 용궁, 염라대왕이 사는 유명계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질서를 흩트려 놓습니다. 그는 생사부에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버리는가 하면, 천상의 복숭아를 함부로 따 먹고 선가의 신약인 금단을 먹어치우는 등, 어떠한 것에도 속박되지 않습니다. 또한 옥황상제, 용왕, 염라대왕들까지 자신의 농락에 쩔쩔 매게 만들며 온갖 권위를 파기하고 이들을 웃음거리로 전락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천궁을 떠들썩하게 한 손오공의 이러한 소동은 모두 부처님 손안에서 일어난 일로서 스스로 업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를 잠재우고자 오행산에다 500년 동안을 가두어 놓는데, 오행산은 석가여래부처의 다섯 손가락이 금, 목, 수, 화, 토로 연이어 이루어진 산입니다. 그리고 500년은 물리적인 삶의 시간을 넘어 손오공이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자기 초월의 의지를 강화하는 마음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손오공이 날아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인 것입니다.
 
 손오공은 돌 속에서 태어난 원숭이지만 워낙 탁월한 재주와 힘 덕분에 원숭이 무리의 왕이 되었습니다. 손오공이 행복하고 만족스런 왕 노릇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두려워졌는데, "어느 날 내가 저승 귀신들의 부림을 받게 되지 않겠는가?”라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는 방법을 찾던 중, 나이 많은 원숭이로부터 "세상에는 저승 명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존재가 셋이 있는데, 하나는 부처, 즉 불도를 닦는 존재들이고, 두 번째가 신선이 되는  선도를 닦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하늘나라의 신으로서 등극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은 죽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오공은 두 번 째 신선이 되는 도를 닦아야 되겠다는 발심을 하고 원숭이의 왕을 버리고 수보리 존자를 찾아갔습니다. 이 수보리존자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공사상에 가장 해박했던 그 수보리가 아닌 도교의 수보리존자입니다. 그럼에도 수보리에게서 받은 이름이 공교롭게도 ‘오공(悟空)’입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대표적인 성격이나, 그 사람의 희망사항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모든 해답이 이름에 들어 있습니다. 깨달음 오(悟)에다 빌 공(空)입니다. '공을 깨달아라', '공을 깨달은 원숭이','공을 깨달으려 하는 원숭이', '수행자 원숭이'인 것입니다.

우선 공(空)이란 바로 연기의 바탕에서 '모든 것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은 중심에 서서 흔들리지 않고 보면 실상이 보인다.' 이런 것이 공입니다. '정해진 것은 없다' 이게 공입니다. 대표적으로 반야심경에서 공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이렇게 여섯 가지를, 세 측면에서 얘기합니다.

불생불멸이란 갑자기 생긴 것 같아도 그것이 없는 데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연이 닿으면 생기는 것이고, 그리고 불멸, 인연으로 사라지면 딴 것으로 바뀌니까 이것이 멸(滅)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사(生死)도 그러하고 생겨났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단순한 생과 멸이 아니라, 끝없는 인연조합일 뿐이며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 바로 공입니다. 부자가 영원히 부자도 아니고 훌륭한 사람이 영원히 훌륭한 사람도 아니며, 하찮은 사람이 영원히 하찮은 것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다만 나 스스로 그것을 바로 보면 나는 무엇으로도 될 수 있는데, 끝없이 바뀌는 인연 속에서 그 인연의 조건을 바꾸어 착한 환경으로 바꾸어 나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들은 다 인연조합인 셈입니다.

그 다음 불구부정, 더러움도 아니고 깨끗함도 없다. 깨끗함도 아니다. 우리가 똥을 볼 때는 더럽다고 여기지만 똥을 먹는 벌레들에게는 참 좋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준에 따라서 한량없이 깨끗할 수 있고, 한량없이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다른 기준에서 보면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계 지어진 이 기준에서 자유롭게 됨으로써 나도 남도 함께 더불어 이로울 수 있고 편안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나가는 것이 참 ‘공’이 됩니다. 다음은 부증불감입니다.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많다거나 적다, 또는 크거나 작다는 것은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지. 작게 보인다고 작은 게 아니고, 크게 보인다고 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내가 그렇게 바라볼 뿐입니다. 진실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봤을 때는 크게 보이는 것이나 작게 보이는 것이나 높게 보이는 것이나 낮게 보이는 것이나 다 평등한 것입니다. 다만 내가 나 스스로를 한계 짓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상대를 과대평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공’입니다.
   이 공을 깨달아 나가려는 것이 바로 손오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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