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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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말을 믿고서 명승을 두루 밟아
분성 성북으로 이끌려 찾았네라.
금관 옛 나라 천지도 늙어
임금이 탄 수레 노닐었던 세월 희미하다.

시조의 능은 깊어 적적하고
장군 차나무도 늙어 풀이 무성하다.
가야의 옛 문물 아직 남아 있으니
풍요로이 주인의 노랫소리 다시 낮아진다.

김종간의 미친소리 열 여덟 번째

『김해읍지』는 “금강사는 김해부의 북쪽 대사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대사리는 큰 사찰이 있는 고을이란 뜻인데, 지금은 대사리 지명도 금강사도 그 흔적도 없다. 다만 한 륜의 「불훼루기」에서 ‘누’를 승려들이 2개월 만에 지었으니 금강사 많은 승려가 부처님을 모신 큰 사찰 이었고 토산조에 “황차-금강곡에 있는데 일명 장군차”로 적고 있음은 참 감사한 선물일 것이다.
금강사는 금강곡에 있었을 것이며 차나무는 금강사 주변에 많이 자생 또는 재배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1985년 가야문화운동 제창 후 혼자서 가락국의 영역을 옛 김해시∙군으로 생각하고 산하를 여행하였다.
그 여행은 고장의 곳곳을 당시의 기록과 구전에 따라 탐방한 것이었다. 그 결과가 1987년 여름에 내어놓은 『가야의 얼을 찾아서』지만, 졸서 다음으로 나에게 큰 희열을 준 것은 송악곡과 금강곡에서 만난 차나무였다. 송악곡의 자생 차나무는 김해시가 보존 관리하고 있으나 금강곡의 차나무는 대부분 개발로 사라졌음을….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은 금강곡 한 자락에 금강사의 간판을 걸고 옛 금강사를 중창하려는 스님과 불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나약하고 그래서 너무나 큰 바보라 원력으로 금강사를 복원하기 위해 진력하시는 스님을 먼발치에서 보기도 아프다.
금강사는 가락국 이후 고려 조선의 천 년이 넘는 역사기에 왕이 직접 김해의 사찰을 찾아 백성을 격려하고 장군수라는 선물을 주어 ‘장군차’라는 김해의 보물 브랜드가 탄생한 곳이다. 금강사가 그 옛날의 대찰로 중창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충렬왕이 장군수라 애찬하였으니 차나무가 풍요로운 사찰로 거듭날 수는 있지 않겠는가. 필자는 종교적 이념을 떠나 깊은 마음을 모아 깜깜한 밤 금강곡 금강사불당을 찾아 남들이 보지 않으니 부끄러움 없이 내 형편대로 일만 원 한 장을 올렸다.
『세종실록』21년 “관찰사 이 선이 도절제사이 교와 함께 누상에 연회를 베풀었는데 누가 무너져 8명이 압사하였다. 이로 1명이 면직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불훼루 건립 후 30여 년 만에 누각이 무너진 것이다.
역사를 기억 못하는 사람은 다시 그 역사를 겪게 된다고 했다. 금강사도 불훼루도 사라진지 오래지만, 불훼루란 이름을 얻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한 김해부사 현맹인의 노력을 기억하며 도관찰사와 도절제사로 불훼루에서 못난 짓을 하다 압사했다는 이름만 남긴 이 선과 이 교등 참 부끄러운 관리를 기억해 본다.

김종간의 미친 소리 열 아홉 번째

금강사의 차나무

충렬왕은 왜 금주에 와야 했는가.
충렬왕은 고려 제25대 왕으로 1236년에 태어나 1308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1274년에 왕이 되어 34년간 재임하였으며 몽고, 즉 원의 침략과 지배와 간섭에 시달린 임금이었다.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였고, 왕후의 월권과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정치에 흥미를 잃어 사냥과 향락에 심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힘이 없어 원나라와 왕비의 눈치를 보는 울분으로 사냥이란 이름 아래 동물을 원의 권력자로 왕비로 보고 화살을 날렸다고 위로해 본다.

몽고의 내정 간섭 속에 왜의 노략질까지 극심해 백성들은 삶이 피폐하다 못해 위기의 나날이었다. 동해와 남해로 노략질을 일삼는 왜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고려는 현종 3년에 왜군 침투 관문인 김해를 금주로 개칭하여 방어사를 두고 동해와 남해의 국방을 맡은 동남해선병도부서사 본영으로 삼았다. 세 차례 설치되었는데 제1차는 문종 32년부터 명종 20년, 제2차는 신종 5년부터 충렬왕 19년까지, 3차는 공민왕 17년부터 우왕 4년까지 였으니 당시 고려의 국방에 김해가 차지한 중요한 위치와 그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충렬왕이 김해 즉 당시 금주에 온 것은 즉위년인 1274년 봄이었다. 즉위 직후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위한 거점으로 설치한 진변만호부가 금주에 있었고 그곳에서 훈련하는 군사를 걱려하기 위해 내려왔던 것이다. 고려와 원의 연합군은 합포에서 출정해 대마도는 김방경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의 힘으로 무찔렀으나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나 본토정벌은 실패하였다. 1281년에 2차로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역시 폭풍우로 실패하였다.
그 당시 금주의 영현은 함안, 의안, 합포, 칠원, 구산이었는데 충렬왕은 합포로 가는 길에 금주의 금강사를 찾았던 것이다.

충렬왕은 큰 치적이 없다는 것이 역사의 평가이다. 원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면서 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여야 했고 세금을 낭비하는 사냥만 즐긴 왕이었을까,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지 못하는 울분을 화살촉에 담았던 것은 아닐까?
원나라의 지배로 고려 땅의 금은보화는 물론 아름드리 소나무가 장작으로 몽고로 실려 가는 참담함 속에서 또 다른 적인 왜국을 물리치고자 원의 힘까지 빌려야 했던 고려 말기. 그리고 김해 땅까지 와서 ‘장군차’를 남긴 충렬왕을 다시 생각해 본다.

1274년이나 1281년 당시 충렬왕의 고려군이 일본 정벌에 성공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리고 일본은 어떻게 변했을까?
충렬왕이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을 격려하여 장군차라고 이름을 내린 사실을 영의정을 지낸 하 륜이 금강사를 찾아 노래했으니, 그 산다수 즉 장군차는 언제 어디서 왔을까?

민간에서는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에게 시집 올 당시 허황옥 공주가 옥함에 차씨를 담아 왔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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