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명열 의원(진영읍, 한림면)

류명열 의원


겨레의 상록수라 일컫는 한얼학교 설립자 강성갑 선생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해방되던 시대 진영을 비롯해 인근에 중학교가 없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개의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은 배움의 길이 막혀 노동일을 하거나 농사를 지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신 선생은 진영에 오셔서 1946년  진영복음중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진영에 최초로 중학교를 세우신 분이다.

 현 진영여자중학교 자리에 일본인 주택과 창고를 매입해  2부제 수업을 실시하였고 진례와 녹산에 한얼학교 분교를 설립해 지금의 진례중학교와 녹산중학교의 모태가 되게 했다.
 
 선생은  재래시장에서 밧데리 확성기를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외치고 다녔다. 낮에는 학생들과 함께 직접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학교를 지었고 밤에도 혼자서 흙벽돌을 만들었다.

선생의 명성을 전해들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방학이 되면 봉사단체를 조직해 한얼중학교에 와서 함께 흙벽돌을 만들었다.

그때, 봉사단 중에 김동길 박사, 전 문교부 장관을 지낸 이규호 박사, 나운영 음악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생은 그 당시 교장 월급이나 교사, 급사, 노동자 월급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주었다고 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노동의 가치는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강성갑 선생의 철학이었다.

당시 진영읍 기관장 회의에서 진영읍 도로에 심을 가로수 나무를 선정할 때 감나무를 심자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감나무를 심으면 “감이 익기도 전에 다 따먹을 것이 아니냐”고 했을때 선생은 “먹어도 배고픈 내 민족이 먹지 않느냐”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구국구민에 두고 과학교육과 기술교육을 통해 창의력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려고 하였다.

선생은 이 땅에 중학교, 고등학교를 세우시고 대학까지 세우기 위해 부지까지 마련해 놓았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란 누명을 쓴 채 그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동족의 총을 맞고 낙동강 수산교에서 38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1954년 5월 경남도에서  그의 동상을 만들어 제막하는 날, 진영읍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소복차림으로 몰려들어 통곡을 하였고, 함태영 부통령께서 직접 추도사를 하시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분이 가신지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겨레의 상록수처럼 살아오신 강성갑 선생에 대한 교육적 이념과 철학을 우리 교육현장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우리시가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야 된다고 사료된다.

그 분이 남긴 소중한 교육적 가치는 우리시의 크나큰 자산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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