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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자 남명이 찾아와 곡을 하고, 묘자리를 정할 때 남명이 직접 그 자리를 점지해 주었다고 한다.
 남명의 문인인 김우옹은 24세 때 남명의 문하에 나아갔다. 이 때 남명은 김우옹을 무척 총애하여 항상 차고 다니던 쇠방울 성성자를 주고 뇌천이란 글자를 써 주면서 대장부의 의리를 취하도록 하였다. 훗날 자신의 외손녀와 혼인시키기도 했다. 김우옹의 형 김우굉도 남명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또한 퇴계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한 번은 퇴계가 남명의 학문 성향을 논하면서, ‘조남명은 노자, 장자의 기미가 있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때 김우굉은 퇴계의 이말을 극력 반박하면서 퇴계로 하여금 그 말을 부인하게 되었다. 퇴계 역시 김우굉의 발언에 주목하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평생에 감히 남을 누르고 자신을 높히며, 세상을 낮게 보는 마음을 품지 못했는데 하물며 성인의 말씀을 빌어 감히 다른 사람은 배척했겠는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고 감히 못할 말인데, 하물며 조남명을 배척했겠는가? 옛말에 흐르는 구슬은 구덩이에서 그치고, 헛된 소문은 슬기있는 자에게서 그친다고 했다. 만약 의심나는 뜬소문이라면 슬기로운 자에게 그칠 것이다. 오늘 이 말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이니 어찌 슬기로운 자를 기다려서야 그칠 것인가?

 남명과 퇴계는 같은 주자학적 문화상황 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학문적인 입장에 있어 다소 차이를 보였다. 퇴계가 형이상학적인 이론 즉 이기론의 해석과 그 논쟁에 관심을 보인 것과 달리 남명은 현실 개혁에 바탕을 둔 삶의 처세관에 더욱 철저하였다는 것이다. 남명의 이런 성향은 주자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당시 학풍으로 볼 때 특별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남명은 젊은 시절 노자, 장자 등 모든 서적을 골고루 섭렵한 바 있다. 또한 벼슬을 마다하고 산림에 은둔하면서 자연스럽게 노장사상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남명사상에는 이같은 일경향이 있었으므로 퇴계가 지적하였을 것이나, 그 역시 다른 유자들과 마찬가지로 남명이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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