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을 부딪치는 것이 도움이 될 거야 / 시요일 엮음 / 미디어창비 / 148p / 1만 2천 원

 

우리의 일상에서 술은 현실 도피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삶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매개이다. 고단한 인생을 달래주기도 하고, 고백의 도구가 될 때도 있다. 술은 인간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음식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문인들에게 술은 사랑의 매개이고, 영감의 원천이고, 열렬한 찬미의 대상이 되어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당대 최고의 문인들은 애주가였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170수에 이르는 술에 관한 시를 남겼다. 문인들은 술을 통해 번뜩이는 영감을 얻고, 시상을 떠올렸으며, 시가 술이 되기도 했다. 술과 문학. 특히 시는 오래전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짝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詩) 큐레이션 앱 ‘시요일’이 엄선한 술에 관한 52편의 시들을 모은 시선집이 나왔다. ‘시요일’에는 창비를 비롯해 7개 출판사가 참여한다. 고시조부터 현대대표시, 창비시선에서 출간했던 시집들의 시, 동시 등을 모두 담았다. 시인들이 직접 엄선한 시를 배달하고 추천하는 큐레이션 기능도 있다. 4만 3000 편이 넘는 시가 담겨있어서 본문·시어·시인·태그(주제어)를 이용해서 검색할 수 있는 방대한 시 콘텐츠이다. ‘시요일’에서 술에 관한 시만 모아 시선집을 펴낸 것은 그만큼 원하는 이용자가 많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 시인들이 쓴 시 52편이 수록됐다. 책 표지는 부담 없이 즐기는 술인 맥주로 장식됐다. 맥주병 옆에 놓인 가득 채워진 맥주잔을 잡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독자들이 책을 오랫동안 곁에 두고 쉽게 덮었다 펼쳤다 하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지 분위기를 연출했다.
 52편의 시에서 등장하는 주종도 다양하다. 신경림 시인은 ‘줄포’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김사인 시인은 ‘소주는 달다’에서 미지근한 소주를, 박소란 시인은 ‘기침을 하며 떠도는 귀신이’에서 뜨끈한 정종을, 김소연 시인은 ‘열대어는 차갑다’에서 차가운 맥주를 등장시킨다. 술을 내세우면서 우리네 인생을 이야기한다.
 
정호승 시인의 ‘술 한 잔’을 읽어보자.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 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하여 단 한 번도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 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어딘지 이 시가 익숙하지 않은가. 안치환, 김원중 등의 가수가 이 시를 노래로 불렀다. 시를 읽는 동안 문득 포장마차를 찾아가 ‘인생’을 친구삼아 한 잔 하고 싶어진다. 지쳐있는 우리를 묵묵히 이끌고 가는, 좀처럼 봐주는 법이 없는 ‘인생’을 좀 달래줘야 할 것 같다.
 
시집 어디를 펼쳐도 우리 인생을 말해주는 시가 있다. 오래도록 읽어왔고, 또 앞으로도 사랑받을 이 시들에는 시인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운 시어로 써 내려간 ‘술’이 담겨 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술을 마시는지 시를 읽는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특별한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다. 시를 어려워하던 사람은 술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마음에 와 닿는 시 한 편을 만나 시에 입문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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