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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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간의 미친소리 열 여섯 번째

감로사를 후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감로사 시를 남긴 안 유의 후손 안민의 행적 때문이기도 하다. 안공은 이 절에와서 선조가 남긴 감로사 시를 시판에 새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감로사의 승려들로 승군 백 여명을 조직, 김해성으로 향하다 입석강에서 왜군을 만나 싸우다 순절하였다. 안 민은 임란 최초의 의병장이자 승군장일 것이다.

『읍지』 인물조는 안 민을 “순흥인으로 함안에 살았는데 문성공 유의 11대손으로 관지감찰. 임진년 봄에 감로사에 있는 문성공의 시판이 오랜 세월에 썩고 상한 사실을 듣고 감로사에 와서 새로이 새기고 있다. 그때 왜구가 김해부의 성을 침략해 오자 승도 일백 여명과 함께 김해성으로 가다가 입석강 위에서 적을 만나 힘껏 싸우다 죽었다.”고 적고 있다.

감로사는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서 영조 7년 다시 중수했지만 지금은 빈ㅌ의 나무와 풀이 낙동강을 바라볼 뿐이다. 감로사의 중창보다 더욱 아름다운 후인들의 책무는 안 민공과 숨져간 승군들을 추모하고 기릴 석비라도 세우는 것이 아닐까. 더더욱 부끄럽고 안타까운 것은 안 민공의 순절비가 불암동에 세워져 있었는데 도로공사로 없어졌다는 것이다. 후손들이 김해에 와서 다른 곳에 세워 줄 것을 원했지만 모두 거절하였다는 소식에, 문화를 공부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고개를 들 수 없다.
정지용 시인이 통영에 와서 산과 바다를 에워싼 아름다움에 자기의 필력으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다고 했다는 말이 기억난다. 필자는 김해인임이 너무 죄스럽고 부끄러워 필을 움직일 수가 없다.

이 부끄러움을 추스르고 일어나 뜻있는 김해인들과 손잡고 어쩌면 이 나라 최초의 의병이었고 승병장이었을 안 민 공과 감로사 승군 스님을 기리고 추모하는 작은 비라도 세우고 싶다.
많은 세월 속에 감로사의 위용과 그 존재는 추억으로 묻혀가는데 ‘감로사’ 간판의 작은 사찰이 있음은 반가운 일일까? 주지와 신도님네는 감로사가 고려시대 대찰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요 불도로 세상을 보며 애국 애향을 실천하였음을 자긍하고 있을까? 불향이 짙고 차향이 넘실대는 감로사 중창을 꿈꾸며 작지만 아름다운 감로사가 되기를 합장한다.

감로사 - 안 유

일엽비래경면평
휘금공벽범왕성
영두창취배람영
석상잔원사우성
일난정화장천녹
야량산월송미명
우민미득전도탄
욕향포단기반생

나뭇잎 하나 거울 같은 수면에 날아오고
푸른 하늘에는 금빛 찬란한 가람,
짙푸른 산마루에 아지랑이 서리고
바위 위로 흐르는 시냇물은 빗소리 같구나.

따뜻한 날 뜰에 핀 꽃 푸른빛을 감추고
서늘한 밤 산허리에 걸린 달빛은 희미하다.
도탄에 신음하는 백성의 근심을 씻어주지 못하고
부들방석에 반평생을 의지하리라.

작가 안유는 고려 고종 30년~ 충렬왕 32년의 인물로 고려의 명신이요 대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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