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계속>>>
 

남명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군자가 때에 맞게 나아가고 물러나는 마땅한 도리에 의거하여 처신하는 것을 보면서 서로의 입장과 처세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자의 길이란 공자나 주자와 같은 고인의 길이고, 고인의 길은 바로 선비의 길이며, 선비의 길은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면서 사리에 맞다고 생각하면 그 도리를 실천하는데 있다. 《논어》 <술이>편에 ‘고인의 뜻을 전하기는 하되 자신이 새로 창작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옛 사람들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항상 배우고 생각하는 것을 병행하는 가운데, 하루라도 도를 이루지 못할까 근심하면서, 정의를 본질로 삼고 예로써 행동하며 겸손하게 살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남명과 퇴계의 연결고리로 안분당 권규가 있다. 권규는 남명과도 일찍부터 친교를 맺었으니, 남명이 부친상을 당하자 조문을 갔으며, 남명의 부친이 안분당 왕고의 묘갈명을 제술 해주었기 때문에 두 가문 간의 교분이 일찍부터 있어 왔다고 되어 있다. 권규는 50세(1545)때 김해의 산ㄴ해정으로 찾아가 남명과 더불어 강론하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남명은 만길이나 우뚝솟은 높은 기상이 있는 학자’라고 칭찬하면서 그 이듬 해에는 그의 셋째 아들 문임을 남명문하에 들어가도록 했다. 또 그는 51세 때인 1546년 봄에 의령 가려촌에 와 있던 퇴계를 찾아가 만났는데, 헤어질 때 퇴계가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 시가 《안분당 실기》에 실려 있는데 이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업에 들어서 한평생 몸을 그르쳤구나.
 한번 웃으면서 서로 쳐다보니 귓가의 터럭이 휘어져 있네.
 끈끈한 관계가 이미 이루어져 잠깐 스친 사이라도 오랜 친구와 같으니.
 깊은 정이 늘그막에 새로워짐을 어찌 근심하리오.
 산나물 캐고 고기 낚으며 분수를 달갑게 여기노니.
 가난을 편히 여기고 도를 즐기는 것에 그대는 모두 맡기게.
 여기에서 강 교외까지는 십리 길인데.
 두건 쓰고 지팡이 짚어 오고 감이 빈번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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