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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남명의 정신과 성격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친 4가지 요소 가운데 3가지 요소가 가야정신과 밀접하게 연관됨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남명의 정신 속에 깃든 의기와 무도, 그리고 검과 의를 숭상하는 화랑도 정신이란 실은 가야정신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이러한 무도 중심의 화랑도 정신은 크게 변질되고 말았지만, 가야문화권의 모태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명은 가야의 독특한 정신과 기질적 영향을 받아서 이것을 그의 의 중심의 경의 사상이라고 하는 독창적인 사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3.남명과 퇴계, 그리고 실천정신
1) 남명과 퇴게에 관한 담론

 선비는 왕명보다 도의 실천적 적합성에 자신의 능력을 견주어 본다. 왕명이 절대적이지만 학문을 존중하는 선비의 지조는 꺾을 수 없다. 남명은 10여차례나 벼슬을 거절하면서 상소문을 통해 군왕의 자질을 통박하였다. 당시 남명의 언론은 정치 발전을 창출하는 개혁을 포함하고 있어서 왕권이나 기득권 세력에게 있어서 두려움이 되고 있었다. 퇴계 역시 이같은 남명을 크게 인정하였다. 퇴계는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얻는 것에 대해 즐겁게 여기고 특별히 품계를 초월하여 6품의 벼슬을 내린 것과 관련하여, 중종 38년(1543)과 명종 7년(1552) 세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다 다시 나아가게 된 것을 되돌아보기도 하였다.

 퇴계는 남명의 덕성을 듣고 “무릇 영화와 이익의 길은 세상에서 다같이 좇는 바입니다. 얻으면 좋아하고 얻지 못하면 슬퍼하며 한탄하는 것은 세상 사람 모두가 그러합니다. 한 번 나아가기를 소중히 하여 결백한 지조를 온전하게 함은 그대가 원대한 식견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편지를 써서 보냈고, 남명 역시 퇴계의 출처에 군자의 큰 뜻이 함의되어 있다고 칭송한 바 있다.

 퇴계가 김우굉에게 답한 서찰에서도, 자신이 남명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지만 서 로 접촉은 없었다고 하면서 항상 혼자 존경해 사모하기를 간절히 한다고 하였다. 남명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군자가 때에 맞게 나아가고 물러나는 마땅한 도리에 의거하여 처신하는 것을 보면서 서로의 입장과 처세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자의 길이란 공자나 주자와 같은 고인의 길이고, 고인의 길은 바로 선비의 길이며, 선비의 길은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면서 사리에 맞다고 생각하면 그 도리를 실천하는데 있다. 《논어》 <술이>편에 ‘고인의 뜻을 전하기는 하되 자신이 새로 창작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옛 사람들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항상 배우고 생각하는 것을 병행하는 가운데, 하루라도 도를 이루지 못할까 근심하면서, 정의를 본질로 삼고 예로써 행동하며 겸손하게 살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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