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오공이 돌아왔다(4)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현장법사는 수나라 말, 불교를 신봉하는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종교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둘째 형을 따라 열한 살 때 출가를 해서 12살에 정식으로 계를 받았습니다. 그가 공부에 매진할 당시에는 제대로 번역된 불경이 많지 않아서 교리 해석에 많은 논쟁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많은 구법승들이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임에도 불경을 구하러 서역으로 구법여행을 떠나는 일이 잦았던 때였습니다. 현장도 당시의 구법승들처럼 불교의 발원지인 천축국(인도)으로 가서 불경을 구하고자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무산되었다가 스물아홉 살이 되어서야 서역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외모도 출중하고 머리는 어마어마한 천재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현장은 20대 중반부터 이미 중국에서 학승으로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현장은 온갖 경전들을 모두 섭렵했고, 인간의 마음에 대한 ’유식(唯識)’까지 접하게 됩니다. 그는 섭대승론을 읽고 인간의 마음 구조에 대해서 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기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도에 직접 가서 경전을 구해 와야겠다는 용기 있는 결심을 합니다.

 현장 나이가 25세 쯤 될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당 태종의 집권초기로 나라가 안정이 되지 않았던 탓에 ‘국경을 넘지 마라’는 월경 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강한 의지를 갖고 두 사람의 길잡이와 함께 중국을 탈출합니다. 하지만 두 길잡이는 사막의 첫 번째 관문에 이르기도 전에 바로 배신을 하고 떠납니다.

 그런데 현장의 원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모든 관문을 다 통과 합니다. 결국 혼자가 된 현장은 말을 몰고 천산북로를 거쳐 서역으로 가는 도중, 사막 한복판에서 말도 죽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지만, 이때마다 반야심경을 외우고 기도 공덕으로 온갖 고비를 넘깁니다. 그는 마침내 죽음의 사막을 지나서, 이오국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이오국에 머무르는 동안 현장의 훌륭한 법문에 반한 옆 나라 고창국의 사신이 현장을 자기 나라로 모셔갑니다.

 고창국의 임금은 현장의 법문을 들어보고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문인지라 몹시 감탄을 하고는 바로 현장과 의형제를 맺습니다. 그리고 현장을 자기 나라에 국사로 붙잡아 두려 했지만, 서역으로 반드시 가서 경전을 구해야한다는 현장의 강한 의지를 확인하고, 황금 100냥, 은 3만 냥, 시종으로 25명, 사미 네 명, 그리고 갖가지 비단과 물품을 준비해 떠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인도까지 가는 도중에 거치게 되는 인근의 국가들에게 친서를 써 주어 편안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큰 배려를 부탁했습니다. 덕분에 그 비단과 황금을 가지고 현장은 16~7년 동안 천축을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현장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그리고 파키스탄을 거쳐 히말라야 북쪽으로 해서 인도로 들어가 나란다 승원까지 갑니다. 당시 나란다 승원에는 100살이 되어 입적을 하려다 동방에서 성현이 온다는 꿈을 꾸고 입적을 미룬 106세 스승 계현이 책임을 맡아 있었는데 드디어 현장이 그 위대한 스승을 만납니다. 유식학의 대가인 계현이 현장을 위해 5년 동안 특별 강의를 해주었고, 현장은 유식을 완전하게 마스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도 남쪽을 돌아 인도 대륙을 한 바퀴 돌며 수많은 유적지를 둘러보고, 645년 현장법사는 많은 경전과 율, 논, 불상, 사리 등을 가지고 당나라로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당 태종이 그에게 구법 여행을 기록할 것을 명하자 열두 권에 걸쳐 직?간접적으로 여행 한 138개국의 지리, 기후, 산물, 정치, 교통, 언어, 전설 등과 사찰·승려의 수, 인물 등 불교적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대당서역기》를 편찬했습니다. 이 책은 당시의 인도 전역에 대한 모습과 내용을 상세하게 담은 지리서입니다.

 그래서 훗날 인도의 유물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 또는 사학자들이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토대로 탐사를 완성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탐사 도중 인도 아쇼카 왕의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이 비와 주위 환경에 대한 내용이 '대당서역기'에 소상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즉, '아쇼카왕의 비로부터 어떤 방향, 어떤 거리에 무엇이 세워져 있다'는 형태의 기술에 따라 인도 유적들이 줄줄이 찾아지게 됩니다. 그만큼 정확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7세기 당시 대외 전략의 방향을 고심하고 있던 당나라 조정에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으며, 현재에도 당나라와 서역에 관한 유일한 기록으로 중국과 중앙아시아, 인도, 네팔, 파키스탄 등과의 교역사 및 고고학 사료로 매우 귀중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1천500년 전에 쓰인 《대당서역기》는 구법을 위해 목숨을 건 한 고승의 용기와 열정의 결정판입니다. 현장법사는 20여 년간 1천335권이나 되는 불경을 번역하여 불교가 인도를 떠나 동북아의 대중 속에 깊이 파고드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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