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자 시의원

하성자 시의원

 불과 며칠 기세를 떨친 맹추위가 김해 산들에 하얀 눈꽃을 피웠다. 누군가에게 연락하고픈 설렘을 안겨주니 설 앞 둔 선물인 듯 반가웠다. 첫 눈은 두터운 기슭에서 이내 녹아버려 모처럼 겨울답다는 소문을 무색하게 했다.

 새해 1월이 하순으로 치달려 섣부른 초조감에 위축되다가 음력으로 치면 아직 연말연시이니 다시 기회다 싶어 안도한다. 섣달그믐과 설날, 과세(過歲) 잘 보내야 되겠다. 명절 앞선 분주함과 초조함을 덜어내니 한시름 여유가 들어앉는다.

 새해 들어 무엇에건 후회가 드는 이들은 나처럼 음력설을 기대해봄직하다. 용기 주는 덕담을 나눌 수 있고 개인적 희망과 다짐을 새로이 세울 수 있으니 양력 새해, 음력 설날이 제각각 의미로써 문화인 것이 기분 좋다. 기분이 기운인 것이다.

 천문과 지구변화를 관찰해 태동한 과학적 계산법, 소위 역법(曆法 calendar)을 바탕으로 기준한 ‘일 년’, 개념은 동일하지만 어떤 역법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그 시작점과 끝점은 조금씩 달라진다. 이를테면 태양력, 태음력, 태양태음력 등인데 인류과학이 정한 지구의 ‘일 년’은 역법에 따라 얼마간의 시차가 발생하게 된다.

 1896년 이전까지 음력을 공식채택해온 우리나라에는 음력 중심으로 한 지혜로운 생활양식과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아 민속과 더불어 전승돼 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젓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밥상문화에 더하여 공식적으로 양력을 사용하되 음력에 근거한 생활양식에도 젓가락 실력만큼 익숙한 편이다. 달력만 봐도 양력과 음력을 병용 표기할 정도이니 문화의 영속성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각종 문서나 첨단인 웹 문서에도 양력, 음력을 표기한 생일을 기입하게 기안된 경우가 많다. 밀레니엄 이후 출생자들은 그런 점을 헛갈려하고 불편해하는데, 그 불편감이 장차 음력에 근거한 문화를 사장시키고 양력 중심의 문화가 활발해지는 시대를 도래시키는 동기가 될 것 같다는 우려감이 든다.

 우리나라가 양력을 채택한 해는 1896년부터라고 한다. 1895년(을미년)음력 9월 9일 고종은 태양력 사용을 공식화 하라는 조칙을 내린다.  개국 504년 음력 11월 17일을 개국 505년 즉 1896년(양력) 1월 1일로 하라는 조칙이었다. 을미사변 직후 고종이 발표했을 당시 조선사회 분위기를 상상해 보면 엄청난 파장이 유발됐을 것 같다. 가히 혁명이라 할 역법 개혁, 음력 중심의 기존문화에 익숙한 이들에게 있어 의식마저 대변혁을 요구하는 개혁이었기에 반발도 거셌으리라. 1896년은 조선에게 고난의 해였고 일면 실낱같은 희망의 해였다. 2월 11일, 고종이 조정을 이끌고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있었고, 같은 해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됐으니 역사 또한 역법만큼이나 대 변혁기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강권에 의해 양력 설날이 보편화됐을 법하지만 누천년 지켜온 오랜 풍습은 고난의 시기를 넘어 해방 이후 그 잔재마저 물리치고 지금까지 음력 1월 1일을 ‘설날’ 이란 고유명절로 전승하도록 이끌었다. 설날은 ‘추석’과 함께 우리나라 최대 명절이자 한 해의 첫 날로써 우리 인식 속에 유전자처럼 자리하고 있다.

 희망의 계절은 봄이 아니라 겨울이 아닐까 싶다. 언 땅 아래 뿌리가 희망인 것이다. 혹한의 폐허 속에서 겨울이 희망을 놓지 않은 덕분에 봄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하고 가는 뿌리가 땅 속을 파고드는 의지, 썩은 낙엽과 짐승 배설물 범벅인 거무튀튀한 흙을 붙잡고서야 뻗어지는 하얀 뿌리, 뿌리가 희망이다. 굳은 땅 비집는 실뿌리의 열정, 뿌리 아니었던들 어떻게 봄이 새 싹을 내밀 것이며, 꽃을 피워 낼 수 있겠는가.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고통이야말로 희망의 뿌리라 불러야 하리.

 봄 가까이 설날이 있단 건 선물 같은 기회, 기꺼이 만나고 공경하고 위로하고 칭찬하고 응원하라 하네, 설날은 그대가 설 날, 그 너머가 이내 봄이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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