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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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의 불교와 불우에서 부른 노래

찬금관성파사석탑 - 일 연

재압비범천패범
걸령차막해도경
기도도안부황옥
천고남왜알노경

파사석탑을 기리며

누를 것 싣고도 비단돛배 붉은 깃발 가벼워라
신력게 빌어 바다 파도 놀라지 않게 고요히 속였다.
어찌 황옥만을 위해 이 기슭에 닿았으랴
예부터 성난 고래 같은 남쪽의 왜를 막으려 함이다.

김종간의 미친소리 열 다섯 번째

파사석탑은 인도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가 서기 48년 가락국 시조 수로왕에게 시집을 올 때 배에 싣고 온 해동의 최초 불탑이다.
작가 일연은 1206~1289년의 인물로 고려 충렬왕때 보각국사를 지냈고 삼국유사를 지은 대선사요 학자다. 옛 가락가야의 도읍지 김해의 역사문화 기행에 ‘불우’를 빠트릴 수 없고, 「가락국기」를 『삼국유사』에 실었고 파사탑의 시까지 남겼음을 감사 드리며 첫 머리에 실었다.

가야사 복원의 신호로 경남, 경북, 대구, 전남, 전북 등 광역 5개 시도와 20여개가 넘는 기초단체까지 나섰다고 하니 그 무엇을 꽃 피울지 기대가 크다. 가야의 본향인 김해는 가야불교의 진실공방으로 뜨겁다.
우리나라의 최초 불교는 고구려 10대 소수림왕 2년에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1987년 3월 가야문화연구회 허명철 회장이 『가야불교의 고찰』이란 저서를 통해 우리나라 불교가 고구려보다 300여 년 앞선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에서 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옥 공주에 의해서 들어왔다고 주장함으로써 가야불교는 가야사의 복원과 함께 뜨거운 문화사가 되었다.
특히 지난 2017년 4월 7일부터 8일까지 개최된 가야사 학술회의에서는 주제인 ‘가야인의 불교와 사상’으로 학술회의 발표자인 한 교수가 “허황후 신화 만들기…사이비 역사학…조작 날조…” 등의 표현으로 발표하였으나 김해시나 관계자들의 대응이 없어 슬픔을 느껴야 했다.

가야는 2천여 년 전에 창국하여 500여 년간 그야말로 독특하고 독창적인 문화를 남기고 산리에 병합되었다. 그래서 가야사의 복원은 늦어도 많이 늦었지만 국제학술회의에서, 학자와 발표자 나름의 논증으로 발표한 것은 좋지만 젊은 학자가 그것도 선배들의 주장을 낮이 뜨거울 정도로 폭언으로 부정해 야만 했던 것일까?
자기가 공부하고 연구한 것을 토대로 가설이나 학설을 낼 수는 있겠지만, 개인적 주관만을 정설이라고 강변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학술회의를 개최한 김해시와 관계학자의 대답을 듣고 싶다.
필자는 합장하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며 가락가야의 고도불교에 대한 여러 기록을 찾아보고 특히 불우에서 고려와 조선의 재상들이 짓고 잂은 시를 살펴본다.

『가락국기』

“자연이 수려하고 기이하여 가히 16나한이 머물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니 칠성이 같이 거처할 만한 곳에서 의탁하여 이 땅을 개척함으로 참으로 좋지 않겠느냐….”
위 기록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즉위 2년 정월에 서울을 정하려고 땅을 살피면서 말한 내용이다. 서기 43년이면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가 가락국에 시집온 때는 서기 48년 여름이므로 가야불교를 허황옥 공주가 들여왔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할 것이다.

가야불교, 가락불교란 표현이나 용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은 불교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창국주가 그 신하들에게 새 도읍지를 설명하면서 불교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 신하와 백성들도 불교의 힘을 잘 알고 있었음이 아닐까.

“수로왕의 8대손 김질왕은 정사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일을 숭상하여 세조모 허황후를 위해서 그의 명복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라 하고 사자를 보내어 근처에 있는 평전 10결을 측량해서 삼보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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