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불자들은 만나거나 헤어질 때 흔히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성불 하세요’입니다. ‘부처님 되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자 열심히 절에 가서 기도를 하고 매달리는데, 도대체 부처가 되라고 하니 덕담치고는 너무 과한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서양 종교의 시각에서는 제아무리 덕담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되라’는 그 말은 당치도 않은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불교적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방의 상좌부 불교와 북방의 대승불교가 가지는 미묘한 차이 때문입니다. 부처님으로서 삼계(욕계·색계·무색계)를 벗어나서 완전히 사라진 존재라고 보는 남방불교의 시각과 영원한 부처님으로 언제,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부처라는 대승불교와의 개념의 차이에서 ‘성불 하세요’에 대한 인식은 서로 각을 달리하게 됩니다.

 소승불교라 불리는 남방불교는 해탈을 통해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목표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성불이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은 돌아가시기 전, 시자 아난을 통해 부처님의 사리는 스님이 아닌 재가불자가 관리하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불교가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정의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법화경은 불탑 신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인 아라한이 아니라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재가불자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 불교의 모습은 수행 위주, 또는 깨달음 위주의 종교로 굳어지게 된 까닭에는 승려 위주의 종교인 남방불교의 영향이 컸던 탓입니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고도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민중의 사상은 유교와 더불어 도교로, 내세보다는 현세에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유교는 미래에 자기의 혼도 하늘의 허락을 받거나 조상신의 도움으로 하늘이 주재하는 세상으로 승천한다는 내세관을 가진 종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자손손 대를 이어감으로써 영속성을 유지하려 했다면, 도교 역시 내세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죽는 것이 너무도 허무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장생불사와 신선이 되는 길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도에서 발생해서 전래된 불교는 유교나 도교와 달리 내세관이 뚜렷해서, 죽음은 곧 다른 삶의 시작이요 종말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전생의 업보에 따라 금생에 태어나서 다시 업을 짓고 죽으면 그 업의 과보에 따라 내세가 열리지만 반드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또는 축생 등 육도(六道)를 각자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업을 닦아 내세를 대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형태라고 강조를 합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사바세계에서 생로병사를 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윤회의 고리를 끊고 그 사슬에서 벗어날 것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곧 해탈이요, 비로소 극락세계에 가서 부처가 되는(성불) 것으로 당시 정서로는 가히 충격적인 가치관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정서에 익숙하지 않은 불교의 가르침에 의구심이 생긴 당대 현장법사가 확실한 답을 구하고자 천축국(인도)으로 경전을 찾아 구법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구법 여행을 통해 ‘부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부처란 바로 언제 어디서나, 큰 생명이나 작은 존재나 모두 거기에 맞는 진리의 법비를 내리는 그런 존재로서 우리와 항상 관계하고 있는 메시아’라는 해답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사상이 중국적으로도 펼쳐진 것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열반을 얻음으로써, ‘윤회로부터 영원히 벗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한다.’, ‘스스로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한다.’, ‘스스로도 평안하게 하고 남도 평안하게 한다.’라는 해탈의 내용이 성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초기 제자들에게 내린 ‘전도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 서유기입니다. 거리는 10만 8천리, 시간은 14년, 그 사이에 81가지나 되는 재난을 겪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온갖 재난들입니다. '9'라는 숫자는 많음을 뜻합니다. 거기에 다시 '9'를 곱하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81가지 난을 겪어야 드디어 성불이 됩니다. 하늘, 땅과 바다가 수시로 열렸다 닫히고, 길목마다 등장한 요괴의 유형도 동물, 식물, 곤충, 신선 등 온갖 장애가 수없이 등장을 합니다. 이 성불 여행의 주인공은 달랑 4명입니다. 한 명의 승려와 3명의 제자들, 길은 멀고 험한데 가는 곳마다 108 요괴들이 길을 막습니다. 그때마다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럼 그들이 왜 그토록 경전을 얻기를 소원 하는가? 중생구제라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종교가 대승불교라지만, 무엇보다 성불을 통해서 선업을 쌓아 자신들의 업장을 소멸하고, 불국토를 만들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이 험난한 여정에 동참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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