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김종간 향토사학자

제5장 가락국 주산 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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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일생은 사람에 대한 희생적 사랑과 실천이었다. 모우를 좌우명으로 삶을 꽃피웠던 작가였기에 모우는 그의 애칭이었고 호가 되었다.

작가가 김해의 수많은 경승지 중에서 분산성을 택해 제영한 것은 분산성이 공격성 전투성이 아닌 어린이와 노약자를 위한 피난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작가의 형 조이추는 구암암, 초선대, 산산대 등의 시를 남겼다.

타고봉 - 허 겸

산술동동첨해정
석인호파작봉명
금봉성화류양일
관조병봉주태평

산을 지키며 북소리 둥둥 바다 정세를 살펴보는
옛 사람이 부르던 것을 파악해 봉우리 이름 지었네
이제 성군의 덕화가 매일 대양에 흐르고 있으니
파리를 봉수대 주위로 비추며 태평곡을 연주한다.

김종간의 미친소리 열 네 번째

작가 허 겸은 『읍지』의 음사조에 “수로왕의 음덕으로 장사랑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타고봉과 타고루 북소리는 나라사랑 김해사랑 가족사랑의 봉우리요 북소리 였으며 그 사랑이 천년을 넘어 오늘까지 이어지게 한 조상의 위대하고 거룩한 지혜와 땀의 유산이다. 이제 후인들은 타고봉에 타고 루를 지어 북을 매달고 조상의 아름다운 유산으로 사랑과 평화를 만대에 전하여야 한다.
타고봉에 잘못 세워진 봉수대는 원래 자리로 옮겨야 한다.
1871년 분산성을 다시 쌓고 남긴 지도를 보면 만장대를 기준으로 동쪽에 타고루, 서쪽에 봉대가 있다. 필자가 4년간 김해시정을 보면서 잘못한 일도 많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일이 더 많은데, 분산성 봉수대를 바른 자리에 옮겨 복원하지 못하고 타고루를 복원하지 못했음에 참 마음 아프고 부끄럽다.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해의 불교와 불우에서 부른 노래

찬금관성파사석탑 - 일 연

재압비범천패범
걸령차막해도경
기도도안부황옥
천고남왜알노경

파사석탑을 기리며

누를 것 싣고도 비단돛배 붉은 깃발 가벼워라
신력게 빌어 바다 파도 놀라지 않게 고요히 속였다.
어찌 황옥만을 위해 이 기슭에 닿았으랴
예부터 성난 고래 같은 남쪽의 왜를 막으려 함이다.

파사석탑은 인도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가 서기 48년 가락국 시조 수로왕에게 시집을 올 때 배에 싣고온 해동의 최초 불탑이다.
작가 일연은 1206~1289년의 인물로 고려 충렬왕때 보각국사를 지냈고 삼국유사를 지은 대선사요 학자다. 옛 가락가야의 도읍지 김해의 역사문화 기행에 ‘불우’를 빠트릴 수 없고, 「가락국기」를 『삼국유사』에 실었고 파사탑의 시까지 남겼음을 감사 드리며 첫 머리에 실었다.

가야사 복원의 신호로 경남, 경북, 대구, 전남, 전북 등 광역 5개 시도와 20여개가 넘는 기초단체까지 나섰다고 하니 그 무엇을 꽃 피울지 기대가 크다. 가야의 본향인 김해는 가야불교의 진실공방으로 뜨겁다.
우리나라의 최초 불교는 고구려 10대 소수림왕 2년에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1987년 3월 가야문화연구회 허명철 회장이 『가야불교의 고찰』이란 저서를 통해 우리나라 불교가 고구려보다 3백여 년 앞선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에서 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옥 공주에 의해서 들어왔다고 주장함으로써 가야불교는 가야사의 복원과 함께 뜨거운 문화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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