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숙 문학박사/창원대 외래교수

이홍숙 문학박사/창원대 외래교수.

 아이들에게 학교는 천국이었다. 온갖 놀 거리와 친구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노는 것에 신이 났고 아슬아슬한 곡예와도 같은 장난을 쳐대기도 했었다. 선생님은 늘 혼내기에 바빴다. 장난치는 아이에게 꿀밤을 먹이기도 했지만 눈가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과도한 장난에 사고라도 날까봐 지켜보면서도 노는 모습이 귀여웠을 것이다. 오래 전의 기억이다.
 딱히 놀이 기구나 장난감이 없던 시절에 학교 운동장의 낡은 놀이기구는 고장이 나 제 기능을 못해도 노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커녕 망가진 자체로 또 다른 놀이기구가 되었다. 교실의 유리창틀 조차도 놀이기구였다. 창틀에 매달린 친구에게 환호를 보내며 떨어질까봐 손에 땀을 쥐기도 했었다.
 더러는 비끗해서 땅에 떨어져서 무릎까지기도 했지만 큰 사고로 이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본인만 조심하면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던 곳이 학교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학교도 더 이상 본인만 조심한다고 해서 안심할 곳이 못되는 것 같다.
 우선 통학로 교통 환경이 그렇다. 학교 까지 가는 길에는 위험한 것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자동차라는 흉기가 도사리고 있다.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학교 가는 길에 사고를 당했던가? 학교 앞의 교통사고를 막는 법을 만들라는 부모들의 눈물어린 절규를 화면에서 본 기억이 엊그제다.
 이제는 학교 내부에도 안전을 위험하는 시설들이 존재한다. 학교 시설이 현대화 되면서 위험요소가 많이 발생한 것이다. 안전을 위해 설치한 시설이 오히려 안전을 위협하는 시설물이 된 것이다.
 이런 시설들에 의한 사고는 아이들이 잘못하여 생긴 사고가 아니다. 아이들의 장난으로 발생한 사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이 날 경우를 대비하여 설치한 방화 셔터를 아이들이 장난으로 건드려서 난 사고가 아닌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교실로 달려가던 아이에게 방화 셔터는 저승사자처럼 다가왔다. 아무런 신호도 주지 않은 채 순식간에 다가와 순수하고 맑은 아이의 영혼과 육체를 제압한 것이다.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순간인가? 이런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꿈엔들 생각해 보았겠는가? 사고를 당한 당사자의 고통과 그것을 고스란히 함께 겪고 있는 부모의 고통은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사고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막대한 치료비와 간병비를 마련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서 모금운동을 벌였다. 국회의원은 안전사고 방지와 사후 대책를 위한 법안을 만들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사고를 당한 아이와 부모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가 바라는 바는 하루 빨리 사고 당한 어린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병석에서 일어나 걸어 나오는 것이다. 또한 학교의 안전사고 예방대책이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배와도 같이 소중한 아이들이 사고 없이 무럭무럭 자라 줄 때 나라도 건강해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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