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여행작가/중앙대 4·19혁명 기념사업회장/ 4·18민주의거 기념사업회상임 고문

김정일 여행작가/중앙대 4·19혁명 기념사업회장/ 4·18민주의거 기념사업회상임 고문.

 지난 11월 17일 서울 중구 덕수궁 중명전에서 제 80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이튿날 신문에는 "알고 계셨나요. 어제 순국선열의 날" 한 줄의 설명과 함께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자들에게 인사하는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이 기사처럼 국민들은 무심코 역사를 잊어가고 있다.

 2020년은 또 다른 역사 4·19혁명이 60주년 되는 해다. 필자는 혁명이 일어나던 당시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학년으로 앞장섰다. 이 때 23명의 대학생들이 희생됐는데, 중앙대학교에서 가장 많은 6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잊혀지는 열사들의 행적을 찾아서 전국여행을 떠났다.

 먼저 찾아간 곳은  4·19 영혼부부였다. 이 부부는 1997년 11월 19일 필자의 제보(기고문)로 영혼부부의 연을 맺었다. 두 열사는 서울 수유동 있는 4·19민주묘지에 떨어져 묻혀 있었다. 영혼부부 약학과 3년 김태년 열사와 여학생 법학과 2년 서현무 열사를 합장시켰다. 그 사실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한 곳이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순천고 출신 정외과 2년 송규석 열사 묘비다. 전남 고흥군 과역면 모교 초등학교 정문 언덕에 있었다. 60년간 드러나지 않아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단 한명도 없었다. 더욱이 모교 순천고등학교나 동창회 사무실로도 문의했지만 4·19혁명 희생자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가슴에 먹먹한 아픔이 밀려왔다.

 반면에 충북 단양군은 후배 신문학과 2년 지영헌 열사를 추모하는 열정과 정성이 대단했다. 지열사의 죽음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군 단위 기관장과 시민들이 4·19혁명 추모제를 열고 그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특히 2006년 대성산 초입에 화강암으로 초대형 4·19혁명금자탑을 세워 단양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받들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혁명에 참여해 희생됐지만, 두 후배의 사후는 너무 달랐다.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 대현고개에 있는 신문학과 1년 전무영 열사의 묘역이였다. 이곳은 열사의 친족들이 사는 고향마을이기도 하다. ‘진말 전씨 종친회’는 회비를 모아 4·19기념추모회를 열고 있었다. 또 2년 전에 새로 세웠다는 묘비도 인상적이었다. 전 열사는 1남 4녀 중에 외아들로 목숨을 잃고 나서 집안이 절손됐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전 열사의 묘비는 4·19혁명 때 60년 7월 25일 세워진 것으로 당시 재경진해 유학생들과 진해시민, 진해고 동창회에서 낸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로 묘비에 적힌 글이 자획을 분간할 수 없어 매우 안타까웠다. 2014년 11월15일 전석호씨를 비롯 친족들이 뜻을 모아오석으로 다시 깔끔하게 묘비를 만들고 무덤도 둘레석을 입혔다. 제단석도 새로 만들었다고 비문에 각인되어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4·19혁명기념 도서관 3층에 자리 잡고 있는 4·19혁명유족회(회장 정중섭)를 찾아갔다. 전 열사 유족(법정관리인)의 본적지 주소를 알려 주어 어렵사리 형(사촌) 전석호(前 경남여상 교장)씨와 그 분의 아들 전원일(시인)씨를 만났다.

 아버지와 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내 나이(80)의 탓으로 비사를 전부 수용하기 힘이 들었다. 열정적인 시인에게 당신의 뜻은 이루어 질것입니다 요점만을 기고문식으로 부탁했다. 일 주일 후 경산전씨 김해종친회에서 2014년 제작한 '4.19혁명 순국열사 전무영 행정록'을 비롯 보존하고 있는 그 간의 많은 자료를 소포로 보내왔다. 그 안에 전무영 열사, 4·19혁명의 상흔과 남긴 혼(魂)이라는 글을 보내왔다. A4용지 13장에 이르는 긴 장문의 글이었다. 시인이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전 열사를 고향집에서 만났고 다음날 4·19혁명으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는 아픈 기억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집안의 내력과 전 열사가 일본에서 출생하여 해방과 함께 귀국한 과정 그리고 형제애와 친족애까지 정감있게 글을 썼다

 시인이 말하기를 자신이 시인이요 소설가가 된 것은, 전무영 열사의 절명으로 큰 충격을 받아서 되었다고 했다. 그의 작품(에세이집 '나무병원'장편소설집 '하동역')속에도 어김없이 전무영 열사에 대한 글이 나왔다. 초등학교 1학년이 받은 충격은 상상이상으로 컸음이 그의 작품 속에서도 곳곳에 등장하고 있었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