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남명학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남명학박사.

 1. 남명사상의 핵심, 경의

 1) 경의 의미와 연관성

 남명사상의 핵심이 경의에 있음을 알려주는 근거로는 다음의 글들이 자주 제시된다. 남명은 만년에 제자들에게 강학하였던 산청군 시천면 사리 소재의 산천재 창문벽에다 ‘경의’ 두 글자를 써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일찍이 말하기를, “경과 의를 아울러 가지면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내 집에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으니 만고에 뻗치도록 바뀌지 않을 것이다. 성현의 천·만 마디 이야기가 그 귀결점은 모두 이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병환 중에 있을 때에도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으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경의 두 글자는 학자에게 지극히 중요하다. 오로지 공부가 원숙해야 하나니 원숙해지면 한 점의 티끌도 마음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라고 하였다. 남명은 그가 평소에 즐겨 찼던 패검에도 명문을 새겼는데, 여기서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다(내명자경 외단자의)’라고 역시 경의를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남명이 이토록 중요시하였던 ‘경의’라는 용어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그것의 연원은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역》 곤괘 문언전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는 “곧음이란 바른 것이요, 방정한 것이란 의로운 것이다. 군자는 경으로써 그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써 그 외면을 방정하게 한다. 경의가 확립되어야 덕이 외롭지 않게 된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볼 때 경이 내면세계를 밝히기 위한 실천덕목이라면 의는 외부세계의 제반사를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덕목임을 알 수 있다. 유학사에서 경과 의라는 덕목은 이처럼 일찍부터 상호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이러한 사실에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송대에 성리학이 발흥하면서부터 였다. 송대 성리학자들이 《주역》 곤괘 문언전에 근거하여 경과 의를 동시에 강조하면서 쓰기 시작한 대표적인 용어로는 ‘경의협지’, ‘거경집의’, ‘주경행의’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경의협지란 ‘경과 의가 좌우에서 서로 도운다’라는 의미로서 이 둘이 상호 보완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주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성리학자들이 경과 의를 동시에 강조한다고 하지만, 이드, 특히 강조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넓게 본다면 의란 경의 체와 용 가운데 용과 연결되는 것으로서 경보다는 부차적인 위치에 있는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경의관념의 전부는 아니다. 이외에도 경과 의를 대등하게 보는 경의관념도 있고, 도리어 경보다 의를 중시하는 경의관념도 있다. 여기서는 이들 세 가지 관념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므로 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것들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요청되기 때문이다.

 

 2) 남명의 성리학적인 경의관념

 (1) 경의와 거경궁리

 본래 주자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이 말하는 경이란 그 주된 내용이 ‘의식의 각성’과 ‘정신집중’으로 요약된다. 의식의 각성이 경의본체라면 정신집중은 경의 효용에 해당된다. 따라서 의식의 각성을 전제로 하여 정신집중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의식의 각성이란 생각이 싹트기 이전인 정시의 경이라면 정신집중는 생각이 시작된 이후인 동시의 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경은 동정을 일관하는 수양덕목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정신집중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 정신집중의 대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이치의 탐구인 ‘궁리’이고 다른 하나는 의의 실천인 ‘행의’이다. 이때 궁리와 행의가 다 같이 의식의 각성을 바탕으로 하여 정신집중 단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보면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궁리와 행의를 연결시켜서 파악하면, 그것은 궁리가 제대로 된 이후 행의가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궁리의 리란 천리로서 도덕적인 원리인 의리를 가르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달리 인식과 실천, 지와 행의 문제로 바꾸어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궁리와 행의는, 행의를 위해서는 궁리가 필요하고 또 궁리가 제대로 되어야만 올바른 행의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이 둘은 그 경중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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