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배 인제대 초빙교수

전경배 인제대 초빙교수.

 줄다리기에 대한 소고(小考)

 옛 부터 우리 민족이 즐겼던 대중적인 승부 오락의 하나로 크고 긴 동아줄을 만들어 편을 가르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줄다리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고사를 드리며, 암줄과 수줄이 연결된 부분 앞에서 축문을 읽으며 사고 없이 행사가 진행되도록 기원하고 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가 울리면 양편은 서로 힘껏 줄을 잡아당긴다.

 줄다리기는 전체의 힘이 한데 모아져야 하기 때문에, 편장(片將)이라 불리는 지휘자가 호흡을 맞추도록 기를 휘두르며 지휘하고 승부는 중앙선에서 줄이 어느 쪽으로 많이 이동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줄이 큰 것은 수 십장이 되며 여기에 다시 작은 줄이 많이 매달려, 여러 사람이 잡아당길 수 있게 되어있으며, 두 줄을 연결시킬 때는 동쪽을 수줄, 서쪽을 암줄이라 부르며 줄다리기에는 한 마을이 총동원되어 편을 가르거나 또는 이웃 마을과 서로 승부를 다투기도 한다.

 이때에는 농악을 치면서 승전기(勝戰旗)를 세우고 환호성(歡呼聲)을 지르며, 잡아당기는 모습은 볼만한 구경꺼리가 된다. 이는 대개 음력으로 정월 보름전후에 행하며, 민간으로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 줄다리기로 일 년을 점치기도 한다고 한다.

  경기가 끝나면 줄은 이긴 쪽이 갖거나 마을 공동의 것이 되기도 한다. 마을 입구의 액막이돌이나 나무에 감아 두거나 썰어서 논에 거름으로 넣기도 한다. 이와 같이 줄다리기는 대개 마을 단위로, 크게는 군 단위로 하는 단체 경기의 하나이다. 줄다리기는 줄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놀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완전한 협동심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 놀이를 통하여 마을 사람들은 향토애와 동질감을 갖게 되며. 줄다리기의 기원을 거석문화시대에 큰 돌 이동수단으로 갈승(葛繩·칡넝쿨)이용하여 왔음을 주장하며, 유네스코에 등재된 영산, 당진, 삼척, 밀양, 의령, 남해의 줄다리기 사례를 대상으로 하여 그 놀이의 유래와 특성을 살펴보고자한다.

 줄다리기의 기원(起源)

 거석문화를 줄다리기 기원으로 보고 우리나라의 거석기념물에서도 지석묘가 다수 분포하여 동부아시아에 있어서의 하나의 중심지역을 이루고 있다. 그 분포는 함경북도를 제외한 전국에 걸쳐서 발견되며 특히 서해에 면한 지방과 큰 하천의 유역에 따라 많이 분포되어있다. 단독으로 위치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 군재(群在)하였으며, 수km에 걸쳐 열을 지은 것도 있다. 그 구조 형식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대별되며 그 중에서 북방식은 탁자식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외형이 유럽의 돌멘(dolmen)유사하다. 남방식은 바둑판식이라고도 부르며 지상에 놓인 거석 밑에 몇 개의 작은 돌로 꾀고 있다. 북방식은 시체를 매장하는 부분을 지상에 구축하였으나 남방식은 지하에 석실을 만들어 매장하였다. 최근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남방식의 지석묘 중에는 개석(蓋石) 밑을 꾀는 받침돌 없이 큰 개석을 직접석실의 뚜껑처럼 얹은 지석묘가 다수 존재하는 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거석(巨石)어떠한 방법으로 이동하였을까? 이동수단은 받침굴레를 이용하여 여러 사람이 합동으로 줄(繩)당기는 방법을  보는 것이 정평이라고 본다. 이 이동수단을 본격적인 농경사회에서는 집단 간의 놀이수단으로 정착한 문화가 줄다리기의 시원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문명권에서 고대부터 줄다리기를 했던 것은 줄이 힘을 전달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기 때문이다. 줄과 도르래만 있으면 쉽게 힘의 방향을 바꾸거나 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또한 튼튼한 줄은 여러 사람이 쉽게 힘을 합쳐 당길 수 있어 거대한 거석문화를 가능하게 했다. 물론 처음부터 튼튼하고 기다란 줄을 만들 수는 없었겠지만, 여러 가닥의 실을 합쳐 튼튼한 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경기 중 하나인 줄다리기는 우리나라에서도 고대부터 시행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줄다리기의 기원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벼농사를 하는 지방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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