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남명학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남명학박사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혹시 자기 뜻을 고상하게 가지면서도 나오지 않을 수 있고(조식이다), 혹은 요청하는데 응하였다가도 혜택을 제대로 베풀지 않아서 다시 시골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성수침이다).

 이제 그들을 잘 맞아들여 옆에다 둔다면 어째서 그들이 전하의 학문을 성취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겠습니까.”

 

1560년(명종 15년) 7월 3일

 왕은 사정전에 나아가 직접 관리의 등용에 관하여 지시하였다.

 이날 조식, 성수침 등 여러 명을 거론하였고 이들에 대한 사관의 논평이 기술되었다.

 나라에서는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사람으로서 민간에 묻혀 있는 인재를 응당 먼저 등용해야 할 것이다.

 성수침(파평산 아래에 은거하고 있었다. 품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조촐하고 깨끗하게 자기 처지를 지키면서 쓸쓸히 세속을 벗어나 상념에 잠겨 있었다.), 조식(삼가사람이다. 숨어 살면서 스스로 지조를 지켰으며 학문에 정통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민간에 묻혀 있는 선비들이다. 조식은 성품이 고결하고 용감하여 절대로 물욕에 빠지지 않았으며 세속을 원망하고 사특한 것을 미워하며 숨어 살면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식견과 생각이 밝고 슬기로웠고 기개와 절개는 굽힘이 없어 그가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서 몸을 떨었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탐욕스러운 사람을 청렴하게 만들고 나약한 사람을 뜻을 세우게 할 수 있는 기풍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다. 늘그막에 지리산의 덕산동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있었는데 민간에 묻혀 있는 선비로서 임명되었으나 거절하는 글을 올리고 가지 않았다.

 임금이 직접 진행하는 관리 이동을 위한 정사에서 민간에 묻혀 있는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선비들을 등용하려고 한 것은 그 뜻이 매우 훌륭한 것이다.

 그러니 관리 추천을 맡은 사람들은 응당 그 뜻을 따르기에 여념이 없어야 하겠는데 빈자리가 없다는 것을 핑계로 이번 정사에서는 후보자로 추천하지 않았으니 지시를 어긴 죄가 크다.

 이조에서 보고하기를 “민간에 묻혀 있는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선비들에게 대해서는 그들에게 알맞은 빈 자리가 없기 때문에 후보자로 추천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훗날 관리 이동을 할 때 임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임금이 직접 관리 이동을 위한 정사를 하는 것은 옛날에도 그런 전례가 있는 것인데 중도에서 폐지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번에 임금이 직접 관리 이동을 위한 정사를 보게 된 것은 대개 향을 위하여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과연 순서를 건너 뛰어 등용되었다).

 

●사관은 논평에서

 “조식은 학문에 고명하며 성수침은 성품이 고요하고 맑아서 모두 한 시대의 고결한 선비들이었고 그 나머지 몇 사람 중에도 더러는 효행이 있었던 만큼 관리 등용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응당 선발하여 여러 벼슬자리에 등용하여야만 옳을 것이다.

 그런데 임금이 직접 관리 이동을 위한 정사를 보는 날에 등용하라는 지시를 내리니 빈 벼슬자리가 없다고 하면서 즉시 추천하지 않았다.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아름다운 뜻이 이미 발현되었는데 다시 막히게 한다면 어찌 임금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관리등용을 주관하고 있는 자들이 설사 빈 벼슬자리가 없다고 구실을 댄다하더라도 진실로 어진 것을 좋아하는 성실한 마음이 있다면 응당 특별

 지시로 벼슬에 임명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뒷날에 가서 보자고 하는 것인가. 임금을 지척에 두고 지시를 받들지 않는 죄가 이미 저와 같고 특별지시로 왕비의 친척인 무식한 자들에게 벼슬을 시킨 것이 이와 같이 많은데도 온 조정에서 누구하나 그 잘못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나라의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갈 것이다.

 사관의 논평은 자못 진지하였고 그 내용 또한 역사의식이 깊다. 조식의 상소가 조정 내의 여론을 일파만파로 들끓는 가운데 사관의 말은 그 어느 사람의 언론보다 정론에 입각하여 수차례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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