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연수원서 한일 학술대회

지난 25일 진영읍 봉하마을에 소재한 강금원기념봉하연수원에서 '누구를 위한 식민지 개발인가'라는 주제로 한일학술회의가 개최됐다.


 봉하연수원서 한일 학술대회 
 "조선인 농민과 분쟁도 상당"
 "농민들 일개 노동자로 전락"


 일제강점기 이전인 1905년부터 1920년대까지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김해 진영과 창원 대산 등지에 형성됐던 무라이농장이 실제로는 일제 식민지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25일 진영읍 봉하마을에 소재한 강금원기념봉하연수원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주최로 '누구를 위한 식민지 개발인가'라는 주제의 한일학술회의가 개최됐다.

 이날 회의에는 우츠미 아이코 게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와, 허수열 충남대 교수,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등이 나와 무라이농장과 관련한 연구내용을 발표했다.

 특히 이날 무라이농장의 경영자였던 무라이 기치베에(1864~1926)가 쓴 서한 등의 자료를 정리해 발표한 우츠미 교수는 "농장은 조선이 아니라 무라이 개인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무라이 기치베에의 손자 며느리인 우츠미 교수는 조선인 전범에 대한 연구와 주장을 이어가며 일본의 양심적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무라이농장 개발 배경과 과정 등을 소개한 허수열 교수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조선의 토지 구입에 열을 올렸다. 특히 배수가 잘되지 않아 농작물의 생산성이 낮고 가격이 싼 곳을 선호했는데 무라이농장이 있었던 낙동강 하류 지역이 대표적이다"며 "저렴한 가격으로 토지 구입해 당시 조선보다 앞선 토목기술로 제방과 배수 설비 등 수리시설을 갖춰 평야지대에 대농장을 형성할 경우, 큰 이익을 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 무라이 기치베에는 1905년부터 김해 진영읍 일대과 창원 대산면·동읍 일대에 조선인 토지 6천100ha를 헐값으로 사들여 개간과 수실시설 확충을 이어가며 1920년대까지 무라이농장을 운영했다.

 무라이 키치베에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 우츠미 교수는 "담배 사업으로 큰 돈을 번 무라이는 농장경영으로 눈을 돌려 조선의 토지를 취득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기술자를 데려오면서까지 무라이농장에 거대한 투자를 한 이유는 결국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다"며 "조선인들이 하천에서 생선을 잡거나 산에서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는 등 농장개발을 명목으로 환경에 순응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다른 주민들의 생활을 무너뜨렸다. 실제 무라이가 남긴 서한 중에는 조선인을 위해 농장을 운영했다는 내용은 단 한 구절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츠미 교수는 또 "조선인 사이에 관례적으로 이뤄지던 토지소유관계가 느닷없이 일제의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법적으로 또는 부당한 방법으로 소유권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무라이농장은 조선인 농민들과의 토지분쟁이나 소송 등 저항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밖에도 우츠미 교수는 "조선에서 수확한 쌀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일본인의 기호에 맞는 일본 품종을 재배했는데, 조선의 땅에서는 이 벼가 잘 자라지 않아 비료를 과잉 투여하기 시작했고 지력이 약해지기도 했다. 결국 조선인들의 벼 재배방식이 재해에 강했다고 서술된 보고서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식민권력의 촌락지배 유형'에 대해 설명하며 "당시 일제의 자본이 지배했던 조선의 농업환경은 결국 농민들의 자율성을 떨어트렸고 농민은 일개 노동자로 전락했다"며 "권력에 의한 생산 통제로 '감시와 명령'에 의한 개발이며 자발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형태가 됐으며 조선인들의 창조가 허용되지 않은 경제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비판했다.

 우츠미 교수 등은 학술회의 다음날인 지난 26일 무리이농장 진영사무소가 있던 구 진영역 일대와 옛 일본인 거주지, 옛 무라이농장 형성지 등지를 현장 답사했다.

 한편 우츠미 교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농장 운영과 관련한 서한자료 등를 면밀히 분석하는 등 한일 합동으로 무라이농장에 대한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