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일 변호사

김은일 변호사.

 오늘은 먼저 어느 책에 나오는 하나의 단락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한층 높은 정치영역으로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정체성과 역사적 운명과 국민의 힘을 완전히 자각한 하나의 새로운 인종에 속한다는 격앙된 느낌, 거대한 집단적 창조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흥분,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에 잠겨서 전체의 선을 위해서 개인의 사소한 이해관계 따위를 잊어버리게 해주는 데 대해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 나도 국민의 일원으로서 지배자가 되었다는 느낌이 일으키는 전율을, 말 그대로 육감적으로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독재체제는 이성적인 논쟁을 직접적인 감각의 경험으로 교묘히 바꿔침으로서 정치를 미학으로 바꿔치는 것이다." 무엇을 설명하는 글일까? 아마도 정확하게 무엇이다 짚어내지는 못하지만 최근 몇 년간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어떤 역사적인 장면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정치의 흐름을 어렴풋이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파시즘 연구의 권위자인 로버트 팩스턴 컬럼비아대 교수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람들이 나치에 선동당해가는 기전을 핵심요약한 글인데, 이 원리는 나치 뿐 아니라 전체주의 일반에 그대로 적용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기전들이 언제부터인가 현대 한국사회에서 촛불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촛불을 들고 나가면 서로 동지애를 느끼고 역사의 최선단에서 뭔가 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흥분을 느끼며, 어두운 밤에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있으면 마치 세상의 어둠을 우리들의 촛불로 물리치는 듯한 환상에 빠진다. 여기에 공중에서 촛불을 든 군중을 찍은 사진이 더해지면 그러한 환상은 폭발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이러한 환상에 젖어 검찰의 적법한 수사에 반대하는 명분 없는 집회에 수만 명이 참가하고, 정권의 친위부대가 되어 비리 장관의 수사를 중단하라는, 비리 장관을 지키겠다는 선언이 공공연하게 난무하고 있다. 이들의 정신이 중국의 홍위병, 폴 포트의 킬링필드, 나치의 친위대와  무엇이 다를까. 스탈린이 죽었을 때 수백명이 따라 자살을 시도한 그 어리석고 환상적인 몽매함보다 나을까. 더군다나 이를 집권여당, 대통령까지 나서서 옹호하는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명분없는 촛불 시위로 인해 광우병의 촛불, 세월호의 촛불, 2016년 12월의 촛불이 무엇이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이제 촛불이 정의의 편도 아니고, 법치의 편도 아니고, 민주주의의 편도 아니라는 사실, 그동안 국민들은 그저 그들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동원된 군중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이 알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아니 이제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초동에서, 여의도에서 법치에 반대하고, 정의에 반대하고, 공정이고 뭐고 간에 거짓말이건 뭐건 우리편이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무엇이 대한민국을 민주주의로 이끌어 가는지, 무엇이 대한민국을 성숙한 법치로 이끌어 가는지 이제는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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