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관학교육기관 '향교'

 

강산문화연구원 산하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원들이 김해향교에서 환경정화활동을 하고 향교의 역할에 대해 공부했다.

 조선시대 관학교육기관 '향교'
 대성전, 공자·성현 모시고
 명륜당서는 경서교육 실시
 

 
  우리나라 안의 지명과 동명에는 '명륜동', '대성동'이라는 이름이 여럿 있다. 다른 지역인데도, 어떻게 같은 지명일까. 답은 향교가 있는 곳이라는 데에 있다. 김해의 대성동은 김해향교의 대성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향교가 있고, 배움과 가르침이 있고, 예의를 익히고 실천한다는 자부심이 배어있는 이름이다. 대성동이라는 지명은 지역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큰 이름이다.

 향교의 역사를 살펴보자. 국도(國都)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3경(京) 12목(牧)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를 교육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향학(鄕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향교가 교육기관으로서 꽃을 피운 것은 조선시대였다. 향교는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정책적으로 그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이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향교는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이다. 사진은 경서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지어진 김해 향교 명륜당.

 향교는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이다. 오늘날의 중등교육기관으로 이해하면 된다. 유학의 이념을 천명하고 미풍양속의 계승발전을 위해 설립된 향교는 '제향'과 '교육' 두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다. 제향 기능은 대성전에 공자와 성현 24위의 위패를 봉안하여 봄·가을로 석전을 올리고 매월 삭망에 분향을 하는 것, 교육기능은 명륜당에서 경서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국역의 대상이 되는 신분이라도 누구나 독서를 원하면 향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였다. 천민이 아닌 백성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준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16세기에 이르면 실록 자료에 '교생은 양반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보인다. 이 기록으로 보아 조선의 신분제적 편제가 강화되었고, 양반 신분만이 향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학교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향교 운영에도 많은 재정이 필요했다. 향교의 교사 등 시설물의 설치·보수·유지, 교수의 후생비, 교생들의 숙식비, 학업활동에 부수되는 제반비용, 그리고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례 · 향음례 등에 이르는 비용은 실로 엄청났다. 향교의 운영에 필요한 재정은 국가에서 지원하였다. 이는 조선이 개국 초에 천명한 숭유억불정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국가에서 유학을 교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향교를 설립하고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도 공급하였다. 향교 운영을 위해 땅과 노비를 주었다는 말이다.

 향교에서는 무엇을 배웠을까. 향교는 시문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을 교과내용으로 한다. 장차 관리가 되어 나라의 일을 맡을 관인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향교 교육의 내용은 제도적으로 과거제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향교에 일정기간 출석한 자에 대하여 과거 응시자격을 부여하는 원점법의 적용이 그 예이다. 지방에서 치르는 과거인 향시의 예정 합격인원을 도별로 제한한 것, 도별 합격예정자의 수와 향교의 정원수를 대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향교가 조선에서 중요한 교육기관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해시 대성동 224번지에 위치한 김해 향교는 유형문화재 217호다.

 김해향교는 김해시 가락로 150번길 21에 위치해 있다. 1983년 8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초기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성현의 위패를 봉안 ·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 및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김해향교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김해읍지>에 의하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0년(조선 선조 33) 부사 정기남이 김해읍 동쪽 다전동에 대성전을 중건하였고 인조 초기 동·서무와 남루가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1683년(숙종 9)에 향교 뒷산이 사태로 무너졌다. 1688년(숙종 14)에 지방 유림 김후수와 부사 이행익이 현재의 위치에 대성전과 동무·서무를 다시 건립하였고, 그 이듬해에 동재와 서재를 건립하였다. 1693년 부사 이하정이 명륜당과 남루를 중건했는데, 1769년(영조 45)에 소실되었고 이듬해 재건하였다. 이후에도 향교건물을 보수한 기록은 이어진다. 그 시간들을 겪어내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해향교는 학생들이 교육을 받던 강당인 명륜당과 기숙사 건물이 앞쪽에 배치돼 있고, 유학의 성현 중 공자를 비롯한 중국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을 모신 동·서묘로 구성된 사당 공간이 후면에 배치된 구조이다. 그런데 현재 선현들의 위패는 편의상 모두 대성전에 모시고 있다.

 김해향교로 들어가 보자. 향교에 들어설 때는 동입서출의 전통예법을 지켜야 한다. 동쪽(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서쪽(왼쪽) 문으로 나오는 것이다. 선조들의 역사가 배어있는 곳이나 사찰을 방문할 때 동입서출의 전통예법을 따르면 어른들에게 ‘잘 배웠구나’하는 칭찬도 듣는다. 김해향교를 방문하면 먼저 홍살문을 만나게 된다. 홍살문은 궁, 관아, 능, 향교 등의 앞에 세운 붉은색 문이다. 출입의 기능이라기보다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홍살문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의복을 단정하게 정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일 것이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풍화루가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특이하고도 고풍스러운 매력을 가졌다. 마치 시공을 초월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풍화루를 지나면 향교로 들어선 것이다. 옷깃을 한 번 더 다듬게 한다. 오른쪽에 동재, 왼쪽에 서재가 있다. 유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옛날 김해의 유생들은 여기서 자신과 가문, 나라를 생각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동재와 서재를 양편에 두고 앞을 보면 명륜당이 보인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교실이었던 곳이다. 동재 서재 유생들이 시간 맞추어 명륜당으로 강의를 들으러 가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배움과 익힘은 얼마나 뿌듯하고 아름다운 일이었을까. 명륜당은 현재 유림들의 모임과 교육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명륜당 뒤편에 내삼문이 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동무와 서무는 20현을 동·서로 나눠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지금은 대성전 안에 모시고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공간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5성과 20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5성(공자·증자·안자·맹자·자사), 송조2현(주희·정호), 신라2이현(최치원·설총), 고려조2현(정몽주·안유), 조선조14현(정여창·김굉필·이언적·조광조·김인후·이황·성혼·이이·조헌·김장생·송시열·김집·박세채·송준길)의 위패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 속 유림들이다.

 김해향교는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분향을 올리고 있다. 전교(典校) 1명, 장의(掌議) 48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석전은 일반 시민들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 장엄하고 경건한 석전은 유학이나 향교를 잘 모른다 해도 그 자체만으로 볼만하다. 우리가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차례를 올릴 때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자신의 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향교의 석전은 말해 무엇 하랴.

 필자는 몇 년 전 참례했던 김해향교 석전을 아직도 기억한다. 석전을 올리기 위해 헌관과 제사들이 대성전으로 올라갔고, 유림들이 그 뒤를 따르던 고요한 걸음은 보는 사람들조차 숨을 멎게 했다. 대성전 앞에 헌관과 집사들이 도열하고, 유림들은 대성전 마당에 놓인 흰 천 위에 줄지어 늘어섰다. 마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경건했다. 집례는 제례의 시작을 알리는 창홀을 했다. 손을 씻고, 절을 하고, 술을 올리는 모든 행위가 집례의 창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진중함이 석전의 품위와 권위를 21세기까지 이어오게 했을 것이다. 김해향교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21세기에도 유효한 예의와 인성을 말한다. 예의와 인성은 한 번도 힘을 잃지 않았던 고귀한 가치이다.

 박현주 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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