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남명학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남명학박사

  1) 대체로 사관의 평가는 긍정적으로 그 요지를 약하면

 ① 남명은 시골에 묻혀 있는 선비지만 어진 사람이다. 왜냐하면 벼슬을 가벼이 여기지만 왕과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스런 마음을 지닌 까닭에 글이 곧고 문제를 바로 지적하였기 때문이다.

 ② 남명은 자신을 맑게 수양하면서 재주를 드러내지 않고 초야에서 살고 있으면서 공명을 얻을 기회가 왔는 데도 마다했고, 더욱이 가난한 살림에 스스로 만족하며 지조를 지킨 점이다.

 ③ 관직을 사양했다고 해서 세상을 등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정대신 보다 더 극렬한 논의로 시정을 지적한 점이 간절하다. 그러니 그 마음이 충직하고 절개가 높음을 알렸다.

 이러한 상소문이 들어가자 왕은 승정원에 조식의 처사가 못마땅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명종은 남명의 상소문이 불경스럽다고 보는 데도 신ㄴ하들이 두둔하고 나서자 격분한 것이다.

 그 단서를 명종은,

 ① 남명의 상소문은 대바르고 간절하기는 하지만 공순하지 못한 말(대왕대비는 어질기는 하지만 깊숙한 궁중에 있는 과부의 몸에 지나지 않고...)을 대왕대비에게 하였으니 군신의 도리를 모르는 것 같아서 매우 한심하다.

 ② (전하의 신하노릇하기도 역시 어렵다)는 말도 공손하지 못하고 (음악은 슬픈 곡조뿐이고 옷은 흰 색깔이니 소리와 색깔애도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라는 말도 불길한 징조라고 주장하였다.

 명종의 이같은 지적에 대하여 당시 사관은 이렇게 적고 있다.

 ‘깊숙한 궁중에 있는 과부의 몸’이라고 한 말은 남명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옛날 어진 선비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옛날 구양수가 황태후를 한 부인이라고 한 말) 공순하지 못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명종은 남명의 상소문에 대한 대답은커녕 승정원에서 죄줄 것을 청하지 않았다고 꾸짖었으니 왕이 좋아하는 것만 순종하게 하고 화가 발생되는 일은 누구라고 말하지 않게 된다면 온 나라 사람의 입을 막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또한 군신이 도리를 모르는 자라면 어찌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고 대바른 글을 올려 시저의 폐단을 직시했겠는가라는 동기에서 사관들은 왕의 언동이 잘못되었음 지적하고 있다.

 단성현감에 임명된 지(1555년, 10원 11일) 한 달여만인 11월 19일 사직하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실제로 상소를 작성한 날짜는 훨씬 이전이라고 생각되므로 남명은 관직에 대하여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전생서, 사도시, 예빈시 주부 등 모두 6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탐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고 여기에 단성현감 역시 종 6품에 불과하므로 수치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당시 정국의 흐름이 밀개 현감직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급기야 단호한 어조로 ‘상소문'을 올리게 되었으니 그 요지를 간추려 논해 본다.

 2) 남명 스스로 부임을 거절한 이유

 첫째, 나이 60세와 학식이 깊지 않고 병과 급제도 들지 못하며 행실 또한 자신 없다고 내세우고 있다.

 둘째, 조정관리 중 높은 자는 과단성이 부족하고 안일과 쾌락에 빠져 있는 가운데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자 없다. 그리고 정치권의 주변 상황이 신하노릇하기 어렵게 된 처지에서 구록만 타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첫째의 경우 자신은 과거에 낙방한 글재주가 없는 자로서 글을 잘 지을 수 없는데 헛된 이름이 나서 전하가 관직을 제수한 것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제하면서 이와 관련된 자신의 지론을 피력하고 있다.

 그것은 도리를 알고 있는 자와 글재주가 있는 자와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글을 읽어서 그 내용을 실생활에 적용시켜 밝혀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글재주와 도리를 갖춘 자의 동격이라고 생각하여 과장해서 글을 잘 지으면 큰 인물인 양 내세우는 풍조가 도리와는 거리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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