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숙 교수

이홍숙 교수.

 올해 여름의 장유 대청계곡은 만원이었다. 틈틈이 내린 비로 계곡물은 충분했고 여름을 만끽하고자 계곡을 찾은 청소년들과 가족들이 타고 온 차들로 계곡 옆 도로도 가득 찼었다.

 김해 장유는 자연계곡이 도시를 관통하고 있어 비교적 자연의 수혜를 받고 있는 도시에 속한다. 우거진 숲 속에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시름을 내려놓는 즐거움이 있는 곳이 장유다.
 
 1910년을 전후해서 제작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를 보면 무계천(茂溪川)이 존재한다. 따라서 대청천의 이 즈음까지의 이름은 무계천이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대청천으로 개명된 것을 알 수 있다. 대청천이라는 이름은 대청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계곡의 상류와는 달리 하류는 잘 가꾸어져 있기는 하지만 물놀이등을 비롯한 공간으로는 활용되지는 않고 있다. 아마도 주변의 주거환경시설로부터 오염되는 것을 염려하는 시민들이 내를 활용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천혜의 자연환경 대청계곡도 일제 강점기의 수난은 비켜갈 수 없었다. 질곡의 역사와 함께 흐르고 있는 것이다.

 1919년 4월 12일 내덕(당시는 용덕리임)에서 출발한 장유만세운동 선발대는 지금의 대청천 어느 지점의 언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선언서는 비장했다. 이를 기점으로 만세운동은 불같이 일어났다.

 백성들은 대청천 바닥의 돌을 주워다가 주재소를 향해 던졌다. 당시의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백성들이 던진 돌이 마치 비가 내리는 듯 했다고 한다. 가히 백성들이 던진 돌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대청천일대는 범등포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갈대숲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성들은 이 일대의 갈대밭에 숨어서 갈대를 꺾어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장유 만세운동의 본거지로서의 대청천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우리 근대사의 큰 정점에 대청천이 놓여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3월 6일자 부산일보 기사는 대청천이 일제에 의한 강제노역의 현장임을 증언한다.

 김해군 장유면 무계리 삼문리 일대를 흐르는 대청천은 홍수때마다 하천제방을 결궤(決潰)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과거 수십년 이래 하천수축의 긴요함으로 인해 주민일동은 이의 개수를 열망하고 있었으나 금회 한해대책시설로서 개수실현의 조짐이 보이자 주민은 기뻐 작약하며 당국의 조치에 감격하여 부락연맹기를 앞세우고 매일 열성으로 공사에 나아가 한해 극복에 만진하고 있다. 한편 무계리 이재민 320명은 국가비상시에 즈음하여 이러한 이제구제의 은혜를 입게 되어 감격을 이기지 못하겠다며 매일 근로에 따라 받는 일당 중에서 일전씩 애국저금을 모아 3일 20명이 16원 8전을 국방헌금으로 내어 단국을 감격케하였다.

 표현상으로는 주민들의 열망에 의하여 대청천을 개수하고 보수의 일부를 국방헌금으로 헌납하는 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의한 강제동원 방식이었으며 일당을 강탈해 간 것이라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부역에 강제동원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토록 질곡의 세월을 거쳐 온 대청천은 당시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대청천을 포함한 장유 무계리 일대가 도시재생지역으로 지정되어 주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구도심을 재생하여 종전의 개발업자 위주의 방식을 개선하고자 마련한 정책이라서 그런지 그 어느 때 보다 지역민들의 관심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정작 주민들은 내용을 잘 모른다. 주최측에서는 설명회도 하고 간담회도 했다고 하지만 생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참석하기 어려운 시간대에 개최되는 등과 같은 방식이어서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을 이행했는지는 의문이다. 일부 관계자들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또 알고자 하는 주민들조차도 누가 무엇을 어떻게 또는 어느 정도로 추진되었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참여할 방식도 모른다. 그래서 다소 의심의 눈길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역사적 유산이 이 지역에 포함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는 반드시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기에 몇 자 적어 본다. 역사의 공공성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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