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자 시의원

하성자 시의원.

 선산 바로 아래 밭이 있다. 팔순 혼자 몸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이 너른 밭을 잡풀 하나 눈에 띄지 않게 살뜰히도 가꾸어 놓았다. 추수하는 나의 단 하루 노동은 그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인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부렸다 펴는 내 동작이 점점 느려지더니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엉거주춤 일어서서 손을 허리에 대고 천천히 쭉 펴본다. 밭을 빙 둘러보니 작업한 고랑보다 남은 고랑이 훨씬 더 많다.

 에라, 좀 쉬고 보자. 엉덩이를 푹 담가 밭고랑에 퍼질러 앉아 땅콩 한 꼬투리를 땅바닥에 탁 놓고 보니 영락없이 바로 저 위 조부모님 쌍봉의 축소판이다. 높이가 나란한 두 언덕에 색깔도 가을 잔디처럼 누르스름한 것이 흡상이다. 무슨 일이건 애착심으로 상대하는 어머니 당찬 일 욕심처럼 야무지고 단단하다. 알도 꽉 찬 것이 틀림없다.

 땅콩 캐기가 힘들어진 탓에 괜히 땅콩을 타박하고 싶어졌다. 땅 위에 콩이라면 또 모를까, 노루나 새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육상에 콩이야 꼬투리 무장을 해야겠지만 캄캄 땅 속에서 웬 꼬투리, 참 어울리지 않는 치장이다. 어색한 화장처럼 땅 속 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꼬투리란 옷인데다 짤막한 모양새에 우둘투둘한 겉껍질은 무슨 조화람? 한 포기에 여문 것, 덜 여문 것 같은 모양 하나 없는데다 개성이 제각각이다. 여문 것은 번데기 같고 무른 것은 무슨 애벌레 모양이다.

 혼자서 타박하다가 뜻밖에 땅콩의 한 살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 경외심이 솟아났다.
 
 땅 밑에서, 그것도 세상이라고는 꼬투리 안 세상밖에 몰랐을 녀석이 재수 없게도 나를 만나 뿌리째 쑥 뽑혀 버렸다. 동시에 땅콩은 자신을 키워준 잎과 줄기와 뿌리와의 이별을 대면해야 한다. 줄기는 애정을 다 해 키워놓은 그의 콩을 다 내주고 이랑 위에 뿌리째로 걸쳐져야 할 팔자다. 게다가 애기땅콩들과 함께 말라가야 한다. 말랑한 땅콩꼬투리는 줄기와 동급으로 취급된다. 곁뿌리처럼 뿌리 가장자리에 매달려 있다가 졸지에 싹수가 잘리게 된 녀석들이 통째로 서서히 말라가기 시작한다. 한때는 햇빛과 바람 덕에 잘 살았지만 이제는 그들로 인해 잎부터 시들게 될 것이다.

 굵고 단단한 줄기들과 짙은 초록 잎들은 창창해 보인다. 수확의 계절만 아니었다면 제 역할을 충분히 해도 될 만큼 기운이 넘쳐 보이지만 불행히도 농부의 손에 정리해고 되고 말았다. 땅콩은 꼬투리 채 소쿠리에 담겨지고 줄기는 뿌리 채 이랑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려진다. 콩을 다 털려버린 줄기에 누구 하나 관심 두지 않는다.

 땅콩의 한살이는 다른 땅속 것들보다 억울한 면이 많은 것 같다. 고구마, 생강, 감자처럼 꼬투리가 없는 땅 속엣 것들은 땅이 허락하는 한 제 힘이 닿는 만큼 커질 수 있지만 땅콩은 어두운 땅 속에서 하필이면 콩깍지 안에 끼어 자라는 통에 마음껏 뻗어 나가지도 커지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땅콩 만하게만 자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울퉁불퉁한 꼬투리 껍질은 인내하고 이겨내려는 땅콩의 고군분투가 만든 영광의 흔적일까.
그러고 보니 땅콩꼬투리가 참 단단하다. 사회의 보호막이 땅콩 꼬투리만하다면 세상은 걱정 없지 않을까.

 나를 둘러싼 주변들에 불만하고, 귀찮아하고 구속당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많았다. 알고 보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땅콩 꼬투리처럼 나를 보호하고 사랑해주는 희생적인 아우라인데 나는 오히려 그것을 거추장스러워한 적도 있었다. 고마운 마음, 숙연한 마음이 자리 잡는 지금은 가을, 나는 땅콩 캐는 농부이다. 이 자리가 꼬투리이건 어느 신의 입 속이건 해 지기 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퍼질러 앉아 있던 땅을 짚고 일어나 허리를 쭉 편 다음 허리를 숙여 다시 땅콩을 캐기 시작했다. 땅콩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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