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숙 문학박사/창원대 외래교수

이홍숙 문학박사/창원대 외래교수

  김해 장유의 만세운동은 애국지사 김종훤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종훤은 장유면 유하리 출신이다. 그는 당시의 촌에서는 보기 드문 엘리트였다. 독립운동가의 산실로 알려진 오산학교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세운 신식교육기관으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학교다.

 김종훤은 졸업 후 장유에서 신문의숙이라고 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종의 국상 소식과 함께 들려오는 수상한 낌새에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상경한다. 상경하여 그가 목도한 것은 3.1만세운동이었다.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서 하향한 그는 용덕의 명망 있는 유학자 김승태를 찾아간다. 장유의 만세운동은 여기서 출발한다.

 사람들을 규합하여 거사를 모의하고 실행에 옮기기 까지 그의 역할은 막중한 것이었다. 김승태와 더불어 선봉에 서서 나아가 대청천 언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군중들은 분연히 일어났고 만세운동은 불타올랐다. 만세백성들이 던진 돌은 마치 내리는 비와 같았고 분노에 찬 백성들은 주재소를 불태웠다. 일본 오장의 머리가 박살나자 헌병들이 김해 분견소로 지원요청을 하러 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하자 분노한 만세운동가는 나루터의 배를 불태워 버렸다. 헌병은 헤엄을 쳐서 칠산으로 건너가야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세 명의 만세운동가가 그 헌병이 요청해 온 지원병에 의하여 현장에서 즉사한다. 죽은 아비의 시신을 등에 업고 ‘살려내라’ 울부짖는 아들의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장에서 연행되어 감옥으로 갔다.

 김종훤도 잡혀갔다. 실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힌 그는 모진 고문으로 손톱이 다 빠지고 눈까지 실명했다고 한다. 현실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육신으로 석방이 되었으나 그 후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짐작으로만 전해 올 뿐이다. 기록도 증언자도 없다. 후손조차 찾을 길이 없다. 유적이라고는 달랑 생거지에 세운 비석 하나뿐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들의 삶과 그 후손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들의 삶은 참으로 위대하고 숭고하지만 그들과 후손들의 삶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해방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나라의 운명은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바뀌었고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세력들은 미군정의 지도자가 되었다.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던 친일세력들이 여전히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의 서슬 아래서 독립운동가들은 숨어 살거나 현실을 외면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광복절 기념식에 친일파들은 차일이 쳐진 단상의 그늘 의자에 앉아 있었고 독립운동가들은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아래에 서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잔치에 동원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후손들은 모든 재산과 명예를 날려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며 가난과 무지의 서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어떤 독립운동가 후손이 말했다.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단상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단상이 싫었다. 지독한 냄새 때문이었다. 단상에 초대를 받았지만 차려 입고 갈 변변한 옷 한 벌 없었던 그들이 입고 온 옷에는 쩔은 냄새가 가득 배여 있었고 그 냄새가 너무 진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손이라도 생존해 있는 독립운동가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만세운동 후 엉망이 되어버린 그들의 삶과 더불어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 후손들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찾아야 한다. 정부 또는 자치단체가 나서서 찾아야 한다. 찾아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나라를 위해 생을 송두리째 희생한 그들에게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선조들의 유적지 복원은 이들 후손들의 고달픈 인생의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 온 억울한 그들의 삶에 정신적 보상이 될 것이다.

 장유의 만세운동에 관한 것은 조순남의 내방가사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거기에는 만세운동과 관련된 유적지들이 기록되어 있다. 나루터, 희생자들을 위해 위령제를 올렸던 장소,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장소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세운동 기념관 건립과 더불어 이들 유적지에도 의미 부여를 해야 한다. 생가터도 찾아야 한다. 찾아서 유적지 표시를 하고 사람들이 찾게 해야 한다.
 장유 사람들이 말한다. 딱히 갈 데가 없다고. 휴일이 되면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 또 아울렛 가?" 아이와 함께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장유 시민들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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