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장/ 남명학 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장/ 남명학 박사

1552년(명종 7년) 3월 9일
 
신묘일. 경상도 관찰사 이몽량이 초계에 사는 전 전옥서 참봉 이희안이 삼가에 사는 벼슬하지 못한 선비 조식을 추천하였다.

 또한 청렴하고 근실한 고을원들인 상주목사 전팽령, 영천군수 김취문, 지례현감 노진을 추천하였다. 희안은 재주와 품행이 뛰어나고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다 지극하였다. 어머니의 3년상을 입은 동안에 집에 한번도 가지 않았으며 상복을 벗은 적이 없었다. 중종 때에 추천하여 벼슬을 주었으나 사례한 뒤에 시골로 돌아갔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관청에 발걸음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의리에 어긋나는 것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존경하고 감복하였다.

 조식은 사람이 정직하고 청렴하였으며 형제들과 함께 살면서 네 것과 내 것을 가리지 않았다.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시험에는 관심이 없었다.

 부모의 3년상을 입는 동안에 상복을 벗은 적이 없었으며 집에 곡식이 얼마 없었지만 언제나 태연하였다.

●사관은 말한다.
 두 사람은 학문과 품행으로 말하면 옛 사람들 속에서 찾아보아도 흔치 않다.

 기묘년이후부터 선비의 기세가 지락되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학문을 꺼리었으므로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어진 이를 존경할 줄을 몰랐다. 그런데 시골에 묻혀 있으면서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 점잖은 사람들이 재상들과 감사의 추천에서 여러 번 알려졌으나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약한 사람을 미워한 데 대하여 하늘이 무관심하지 않아 그런 줄을 알 수 있다. 우애 있는 사람이 참으로 성의껏 구한다면 재주와 품행을 겸비하고 학문에 해박하여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고 도를 지키며 이속과 녹봉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찌 두 사람뿐이겠는가.

1552년 (명종 7년) 7월 11일
 
이조에서 제의하영ㅆ다. ‘묻혀 있는 선비들을 찾아내 가지고 급히 보고하도록 이미 8도에 지시하였으나 경상도, 청홍도, 경기에서 보고되었을 뿐 다른 도의 보고서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작은 나라에서는 쓸 만한 사람이 있게 되면 뚜렷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서면으로 제기하는 사람들을 우선 등용하기 바랍니다.’

 진중 사는 조식은 정직하고 청렴결백하였다. 형제간이 같이 살았는데 자기 물건이라고는 따로 없었다. 부모의 기상을 입는 3년 동안에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집이 가난하여도 명예와 출세를 바라지 낳았다. 모두 주부로 임명하라고 지시하였다.

1553년 (명종 7년) 10월 2일
 조사수를 형조판서로, 신영을 이조참판으로, 심통원을 호조참판으로, 왕희걸을 의정부 사인으로, 이거를 홍문관 교리로, 김규를 이조좌랑으로, 조식을 전생서 주부로 임명하였다.

1553년 (명종 8년) 윤 3월 18일
 
조식을 사도시 주부로 임명하였다(조식은 굳은 절개를 깨끗이 지키고 예법으로 자신을 자제하며 영달이나 이욕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품행이 뛰어나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1553년 (명종 8년) 윤 3월 26일
 
조식을 예빈시 주부로 임명하였다.

1553년(명종 8년) 5월 6일
 
성제원, 성수침, 조식, 이희안, 조욱 5명은 모두 묻혀 있던 선비들로서 6품 벼슬에 임명되었다. 조식은 타고난 천성이 강개하고 정직하여 시세에 맞추어 행동하지 않고 자기 지조를 깨끗이 지켰다. 속된 사람들과 말할 때면 수치감을 가지고 가버릴 생각을 하였다. 임금이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도록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1555년(명종 10년) 10월 11일
 조식을 단성현감으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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