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가야의 종주국 가락가야

김종간 향토사학자

 옛 시인의 노래에 어우러진 가야와 김해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파괴되었고 파괴되는 역사와 문화의 현장, 그리고 자연에 미친소리를 토해 내기도 했습니다.  2018년 8월 김종간

변한은 가야제국이 되고 변한의 구야국은 가락국이 되었다.

김종간의 미친소리 첫 번째

 가야의 종주국 가락국이었던 김해지방에는 3세기 이전부터 5세기에 이르는 수많은 고분유적이 자리 잡고 있다. 태풍과 호우에 산야가 파헤쳐져서 나왔고, 농부의 괭이와 호미질에도 출토되었다. 산업화 과정의 불도저와 포크레인에 파괴되고 다시 묻히면서도,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도움이었는지 김해지방은 고분군 박물관인양 각종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김해 땅에서 발굴 조사된 유적은 김수로왕릉을 시작으로 신석기, 청동기, 삼한, 가야 등 다양한 시대에 걸쳐 130곳이 넘지만, ‘가야’라는 일관된 역시작 흐름을 유지한 채 외부 세력, 예컨대 같은 시대의 백제, 고구려, 신라는 물론 후대의 고려까지도 김해에 문화적 흔적을 남기지 못한 것이 이채롭다.

 특히 고고학계에 큰 성과를 올려준 대성동 유적과 구지로, 양동리, 예안리, 칠산동, 퇴래리, 내덕리, 능동, 덕정리, 구산동, 유하리 전 왕릉유적은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가야국의 존재와 가야사 정립을 위한 역사 문화적 증거로 고분군 발굴 유물의 그 수량과 다양성이 있다면, 1988년에 첫 회를 시작으로 올해 제23회를 맞이한 가야사 국제학술대회는 ‘신비’라는 말로 포장되고 왜곡으로 뒷전에 밀려나 있던 가야사를 재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가야사는 아직도 춤을 추고 있다. 아니, 후세인들이 가야의 역사를 춤추게 하고 있다.그 책임은 정치인 이전에 가야의 후예인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학문에 정치가 개입되어서는 안 되지만 정치인이 학문의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 밀알과 소금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정치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가야인들은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변한은 가야제국이 되었고 변한 구야국은 서기 42년 가락가야국이 되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이 주장은 「가락국기」에 의한 주장이다.

 많은 학자들은 어제도 지금도 중국의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조에 기록된 서기 3세기 후반의 변한사회를 그 시대의 비교적 정확한 묘사라고 평가하고 있다.

 「위서」의 내용을 보면 “변한의 다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이웃의 마한과 예, 왜가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또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도 공급한다”라 기록했다.

 학자들은 이 내용의 해당지역을 김해로 비정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철의 왕국 가야’의 모습이 정확히 묘사된 반면, 가야의 건국시기는 서기 300년경으로 늦어지게 되는 것이다.

 진수가 위, 촉,오의 세 나라 역사를 쓴 『삼국지』에 실린 변한의 기록은 참으로 고맙고 반가운 자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더 귀하고 훌륭한 기록일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전근대 사회일수록 사서 편찬이 당시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사실을 왜곡한 경우가 허다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의 『삼국지』는 정확하고, 우리의 역사서만 못 믿을 내용으로 채워졌을까?

 『삼국사기』는 고려 때 만들어진 관찬사서다. 임금의 명으로 당시 최고의 학자로 구성된 편찬위원들이 최초로 만드는 역사서를 기분대로 또는 왜곡해서 기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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