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숙 문학박사/창원대 외래교수

이홍숙 문학박사/창원대 외래교수

 학교 교정에 그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봉분이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학생들이 등교하면서 설립자의 무덤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모양이다. 생각만 해도 묘한 광경이다. 아무리 위대한 설립자라 할지라도 학교 교정에다가 무덤을 존치한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와 닿았다.

 그러나 설립자의 취지와는 달리 오랫동안 무덤은 학생들에게 시달렸던 모양이다.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친일 행적 때문이었다고 한다. 급기야는 학생들의 저항에 견디지 못하고 무덤은 밖으로 밀려 났다고 한다. 친일파의 거두이자 고려대학교 설립자이고 동아일보사 설립자 김성수에 관한 이야기다.

 몇 년 전이었던가 고려대학교 교정에 버티고 있던 그의 동상에 밧줄을 걸어 끌어내리는 모습을 언론을 통해 본 기억이 있다. 동상도 두고 보기 역겨웠는데 하물며 무덤까지 있었다니.
 
 김원웅 광복회장의 강연을 통해 이 사실을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더운 한여름에.
그의 집은 친일갑부의 집답게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 집의 대문 또한 대단했는데 단단한 쇠로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그의 친일행적은 이 대문에서 빛을 발했다. 김성수는 대동아전쟁 군수품을 만드는 데 써달라고 이 쇠로 만든 대문짝을 일제총독부에 헌납했다고 한다. 일제의 침략적 야욕에서 비롯된 그 전쟁에 얼마나 많은 우리 백성들이 강제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던가? 그의 일본 앞잡이 노릇의 백미를 보여 준 것이다. 탄피를 만들기 위해 민가의 숟가락까지 뺏아갔던 일제에 자진하여 크게 한 방 쏜 것이다. 간도 쓸개도 자진해서 빼 준 것이다.
 
 그러고서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의 건학이념은 무엇이었던가?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던가? 일제가 물러 간 뒤 왜 저들은 청산되지 못했던가?
 친일의 댓가로 누려왔던 저들의 삶에 비해 독립운동가의 향후의 삶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떤 독립운동가가 돌아가셨는데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각자 집에서 장례를 치르던 시절이라 집으로 문상을 가던 때였다. 수소문 끝에 문상객들이 찾아갔으나 관을 앞에 두고 절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좁은 방에 관을 놓고 나니 절을 할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가의 비참한 삶의 현실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로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바친 삶의 댓가가 궁핍과 회한으로 남아도 괜찮던 시대였던가? 독립운동가들의 나라를 위한 희생이 누군가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위한 것이었던가? 친일부역자의 권세와 명예를 위해 저토록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인가?
 
 서울 강남의 땅 70%가 친일파 후손들의 소유라고 김원웅 회장은 덧붙인다. 숨이 막히는 것은 더위 때문이 아니다.
 
 총칼 대신 경제보복이라는 작두를 휘두르며 누런 눈동자를 휘번뜩이는 저들 만행의 자신감의 원천이 무엇인지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더 이상 과거사를 두고 저들에게 인간적 양심 따위를 논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강남 땅 70%가 친일파 후손 소유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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