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관련 유적 '선조어서각'

 

자원봉사자들이 봉사활동을 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 관련 유적 '선조어서각'
 선조가 모든 백성에게 보낸 편지
 권탁, 100여 명 백성 구해 돌아와

 김해에는 사충단과 함께 임진왜란과 관련한 유적이 또 하나 있다. 선조어서각이다. 김해시 흥동로 123-18(흥동 산 20-3번지)에 위치하는 선조어서각은 경남문화재자료 제30호이다. 선조가 내렸던 선조국문유서는 보물 제951호로 지정돼 있다.

 유서(諭書)는 임금이 써서 내리는 명령서이다. 어서각(御書閣)은 임금에게 받은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임금이 붓을 들어 직접 쓴 글을 받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어서를 받은 가문에서는 임금의 글을 잘 받들고 대대로 그 영광을 전하기 위해 따로 건물을 지었다. 그 건물을 어서각이라고 한다. 어서각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다. 하지만 김해의 선조어서각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보통 어서각은 가문이나 지명을 따 이름을 정한다. 그런데 김해의 어서각에는 '선조'라는 임금의 시호가 붙어있다. 그 이유는 선조가 특정 신하인 개인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를 받든 어서각이기 때문이다. 선조는 백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어려운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썼다.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쓴 글이라 당시의 전쟁 상황까지도 엿볼 수 있다.

 

강산문화연구원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자들이 선조어서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선조국문유서. 선조는 왜 백성들에게 편지를 썼던 것일까.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이 땅의 착한 백성들을 포로로 마구 끌고 갔다. 백성이 없는 나라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 백성을 지켜내지 못한 나라는 또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왜군에게 끌려간 백성들 중에는 칼날 앞에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부역을 해야 했다. 그 역시 나라가 지켜내지 못한 조선의 백성이 겪는 고초였다. 선조는 백성들을 다시 찾아와야 했다. 그것이 곧 나라를 지키는 일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한글로 쓴 선조의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백성에게 이르는 글이다. 임금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처음에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서 (왜적을) 이끌어 다니는 것은 너희의 본마음이 아니라 (도망쳐) 나오다가 왜적에게 붙들려 죽지 않을까 여기 기도하며 도리어 의심하기를 왜적에게 속해 있었으므로 나라에서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하기도 하여 이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그런 의심을 먹지 말고 서로 권하여 다 나오면 너희에게 각별히 죄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중에 왜적을 잡아 나오거나 왜적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 나오거나 포로가 된 사람을 많이 데리고 나오거나 해서 어떠하든 공이 있으면 양민과 천민을 막론하고 벼슬도 시킬 것이니 너희는 생심이나 전에 먹고 있던 마음을 먹지 말고 빨리 나와라. 이 뜻을 각처의 장수에게 다 알렸으니 생심이나 의심하지 말고 모두 나와라. 너희들이 설마 다 어버이나 처자가 없는 사람이겠느냐? 너희가 살던 곳에 돌아와 예전처럼 살면 좋지 않겠느냐? 이제 곧 나오지 않으면 왜적에게 죽기도 할 것이고 나라에서 평정한 후에는 너희들인들 뉘우치지 않겠느냐? 하물며 명나라 군사가 황해도와 평안도에 가득히 있고 경상도와 전라도에도 가득하여 왜적들이 곧 급히 저희의 땅으로 건너가지 않으면 조만간 (조선군과 명군이) 합병하여 부산과 동래에 있는 왜적들을 다 공격할 뿐 아니라 중국 배와 우리나라 배를 합하여 바로 왜국에 들어가 다 토벌할 것이니 그 때면 너희도 휩쓸려 죽을 것이니 너희들이 서로 (이런 이야기를) 전하여 그 전에 빨리 나와라."

 당시 낙동강 인근에서는 구포, 덕천, 물금, 마사, 가락 등지에 왜적이 성을 쌓고 주둔해 있었다. 그 지역의 왜군에게 끌려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일이 시급했다. 선조는 "누가 이 유서를 가지고 왜적 속에 들어가 우리 백성들을 불러 올꼬?"라며 남쪽 지방의 장수들에게 따로 교시를 내렸다. 그러나 왜군의 기세가 드셌던 당시에 선조의 뜻을 받들고 나서는 장수가 없었다. 이때 나선 이가 권탁이라는 인물이다.

 권탁(1544~1593)은 안동 권씨의 후손이다. 경상도 선산부 월동리(현재 경북 구미 인근)에서 아버지 권길원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왜란을 겪으면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란을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권탁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는 "임금이 치욕을 당하니 신하는 죽어야 하는 날, 대장부가 어찌 몸을 산골짜기에 숨기며, 하물며 총검을 잡고 싸우는 일을 어찌 녹을 먹는 사람만 하겠는가"라며 일어섰다. 장수들조차 왜적이 주둔한 남쪽 지방에 가기를 두려워했는데, 권탁은 홀로 걸어서 김해까지 왔다. 권탁은 스스로 김해의 수성장이 되기를 청했고, 갑옷과 투구를 쓰고 군사들을 격려하며, 밤낮을 쉬지 않고 경계한 덕에 왜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선조국문유서를 받든 권탁은 포로의 가족처럼 꾸미고, 밤중에 왜적의 진지로 잠입했다. 새벽에 조선 백성 수 십 명이 땔감을 마련하러 나오자 권탁은 선조의 국문유서를 읽어주며 함께 가기를 권했다. 백성들에게 왜적을 속일 계책을 일러주고, 다음날 권탁은 낙동강 어귀에 배를 대고 장사 수십 명을 수풀더미에 숨겨둔 채 왜적과 백성을 기다렸다. 한밤중에 백성들을 포승줄로 엮어 앞세운 왜적 40여 명이 나타났다. 권탁은 왜적에게 술을 먹이며 시기를 보다 왜적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숨어있던 장사들이 뛰쳐나와 나머지 왜적들을 모두 베었다. 이 때 권탁은 큰 상처를 입었으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100여 명의 백성을 배에 태워 함께 김해로 돌아왔다. 권탁이 백성들을 구출해 온 지역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목숨을 던져 백성들을 구해 온 그 충정과 용맹만큼은 오롯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권탁은 이후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크게 덧나 관직을 받기도 전인 1593년 11월 21일 쉰 살의 나이로 김해성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권탁이 김해 출신은 아니나, 김해성을 지키며 임금의 뜻을 받들고 백성을 구했으며 김해성에서 숨을 거두었기에 김해의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김해읍지>는 권탁에 관한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안동인(안동 권씨). 임란에 남중(남쪽 지방)의 백성들이, 적에게 포로로 잡혀 바다로 건너갈 즈음에, 탁이 선조대왕의 언문교서를 받들고, 성중에 잠입하여 100여 명 우리 백성을 달래어 데리고 나왔다. 이로써 공을 세워 벼슬에 음서될 수 있었는데, 여러 해 되도록 미루어 왔다가 임인년에 탁의 증손 재도가 상소를 올려 숙종조에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를 증직하였다."
 
 

흥동에 소재한 선조어서각 전경.

 

선조어서각을 소개한 현판.

 1870년(고종 7) 김해부사 허전은 권탁을 기리고, 권탁의 후손들이 보관해 오던 선조국문유서를 봉안하기 위해 임호산 아래 선조어서각을 건립하였다. 세월이 흘러 건물이 퇴락하자 1989년에 원래 있던 곳에서 동쪽 기슭으로 옮긴 현재의 자리에 현충사와 함께 증축하여 새롭게 단장했다. 선조국문유서는 1975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다시 1988년 보물 951호로 승격됐다. 현재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75×48.8㎝ 크기이며 양질의 저지(楮紙·닥나무 종이)에 한글로 쓴 교서이다. 유서지보(諭書之寶·임금이 내리는 명령서에 찍는 어보)가 세 군데에 찍혀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또한 모든 공문서를 한문으로 기록하던 시절에 한글로 된 흔치 않은 국왕의 교서라는 점에서, 국문학 분야에서도 중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선조국문유서와 김해성, 권탁에 대한 이야기는 강건하고도 아름답다. 한 명의 백성이라도 지키고자 했던 충절이 담긴 선조어서각앞에 서면 그 마음이 느껴진다.

 박현주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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