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인간 존재의 확인나갑순 수필가

 

나갑순 수필가

 한 가족이 화면에 등장한다. 환상적인 화음으로 '백만 송이 장미'를 부른다. 분홍색 같은 의상을 입었다. 5세 정도 아이가 엄마 아빠의 표정을 살피며, 청중들의 반응에 답이라도 하듯 간주곡에 맞춰 춤을 춘다. 방청객들의 투표가 이어진다. 3연승, 하와이 4인 여행권이 주어지고,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행복한 모습으로 퇴장을 한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의식하고 반응하며 살아간다. 오늘 내가 마주하는 상대방의 기호에 따라 의상과 신발, 언어의 선택도 예외가 아니다. 한시도 놓칠 수 없는 타인의 반응에 호응하며 소통하는 것이 우리들 삶이다. 직장과 단체 가족관계에서는 물론 방송 매체는 더하다. 시청자들의 기호에 따라 얼굴 표정과 몸매, 의상, 소위 인간상품들의 매력적인 것들로 화면을 채운다.

 자신의 편함보다 타인을 배려하며 예의에 맞는 옷을 고른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예의와 상식을 동원하여 타인의 기호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이방인이나 부적응자로 오인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유행에 민감해지고 타자의 반응을 살핀다. 
 
 더러는 개인의 주체성이 상실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어쩌면  자신의 눈으로만 세계를 바라보고 세계 즉, 타자가 없다면 개개인들을 구별하고 개념화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타자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변별 수단은 자기와 환경, 개별성을 인식하는 능력에 있다. 타자로 인해 나라는 주체가 인식되고 그들과의 차이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자크 라캉의 타자는 자기 너머 있는 절대적 타자를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 생활하는 전체적 환경이다. 우리가 생존하고 번성 하려면 결국 타자 속에 들어가 상호간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에 라캉은 결핍과 부재는 욕망의 동인이며,  주체를 영원한 결핍으로 욕망을 환유로 본다. 인간의 욕망은 영원히 운동하는 상태로 잃어버린 대상 찾기로서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그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대상을 향해서 노력하고 나아가는 힘을 갖게 한다. 그래서  예술인들은 음악, 무용, 영화, 그림 등 제각기 작품을 통해 존재를 확인한다.

 요즈음은 SNS를 통해 그리 중요하지도 않는 개인의 일상을 공유하는 이들이 있다. 은근히 '좋아요, 멋져요, 예뻐요' 등 팔로우들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다. 그들의 숫자로 개인의 인기도를 측정한다고나 할까. 그냥 지나치는 눈팅 족들은 '이런 걸 뭐라고' 하면서도 은근히 곁눈질한다. 어쩌면 개인의 노출은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결핍에서부터 비롯된다고도 볼 수 있다. 무엇을 하든 우리는 타자의 욕망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오늘 함께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눈 이들 속에 과연 나의 생각은 얼마나 상대에게 말할 수 있었는지. 타자 속에 나는 어떠한 행동을 하고 그들의 욕구에 얼마나 부합 되었는지.

 타자의 욕망을 쫓다보면 어느 날 문득 나는 과연 왜 살며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인지,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인가, 이 끝도 없고 존재하지 않은 실재계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인간 욕망의 한계를 느낀다.

김해일보  gimhae114@naver.com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해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