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논설위원

한상규 논설위원

  지금 한국 경제는 안팎으로 극심한 시련을 맞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가와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오래동안 명쾌하게 풀어 낼 수 없는 딜램마에 빠져있다. 최근 일본의 무역보복은 우리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 생산에 치명타를 주고 있다. 이 문제를 조속히 풀지 않고는 양국 모두에게 피해가 크지만, 경제 규모로 봐서 우리의 경제가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더 극심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우리와 가장 인접한 지역으로서 전통적으로 동질성이 많다.

 여기서 동질성을 역사적인 관점서 외면한 일본인의 삶의 태도는 우리와 영판 다르다. 흔히 알려진 얘기지만 한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셋을 놓고 보면 전혀 다른 가치관과 태도를 보여 준다. 세 나라 사람이 우동 집에 가서 식사를 주문하는데 우동 그릇에 파리가 빠져있는 것을 본 중국인은 아무 불평 없이 그릇을 비운다. 일본인은 파리를 살짝 건져내어 대충 먹고 나와서 그 음식점에는 가지 말라고 알리고 다닌다. 한국인은 주인을 불러 화를 내며 다시 만들어 오라고 야단을 친다. 이 얘기는 세 나라 사람의 감성을 비유한 것이고 반드시 그렇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느 태도가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도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 지금 일본인의 태도는 냉정하면서도 사태를 주시하면서 우리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현실대응책에 고심을 하고 있다. 한일 관계서 일본, 중국, 미국과 대사를 상호 파견하고 있다. 일본이 이렇게 나오기까지 외교라인에서 정보 수집이 미흡한 것 아닌가. 일본은 자기들 보다 강한 나라에는 겸손하고 약한 나라에는 오만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리적인 현실대응을 해야 한다. 임진왜란 와중에서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보면 광해군은 전후 복구 사업으로 정신이 없었지만, 후금의 움직임만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국제 정세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광해군은 후금이 명나라를 침입하기 전에 조선을 먼저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후금을 자극하지 않고 잘 다독거리는 정책을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힘을 키워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광해군은 수시로 후금의 상황을 보고하게 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무기를 수리하고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지. 또한, 서울 주변 요충지의 방어 태세를 수시로 점검하였어. 나아가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쓰고 '기유약조1609'를 맺어 왜와 국교를 재개하였는데, 이것은 왜와의 관계를 안정시켜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는 데 집중하기 위함이다.

 광해군이 후금에 대해 잘 달래는 정책을 펼친 덕분에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명과 후금 사이에서는 여전히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어. 당시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의 상황을 생각하면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긴장과 충돌은 곧장 조선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1618년, 마침내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무순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오랫동안 후금과 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광해군은 명나라가 후금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명나라는 지는 해이고, 후금은 뜨는 해와 같다"고 했다. 몸소 임진왜란을 겪은 광해군은 전쟁의
참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명나라에게 조선은 임진왜란을 끝낸 지 얼마 안되기 때문에 군사를 보내 도울 형편이 못 된다며 군대 파견을 미뤘다.

 광해군의 중립적 실리 외교를 역사적 교훈으로 일부 참조하여 국익을 우선시하기 위한 미·중·일·북한 과의 외교적 전략을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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