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장/ 남명학 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장/ 남명학 박사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개인의 역사가 아닌 당대의 정치사회 모든 면을 가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기록을 존중한다. 비록 시대적 상황이 다를지라도 동일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은 공통된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삶의 문제를 파악하는 자료로서 앎의 해석이 동반하기 때문이다. 남명에 관한 모든 기록을 비교적 충실하게 기록한 사관(史官)의 붓이 『조선왕조실록』에 여과없이 남아있다.

 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5년간 총 1893권 888책의 방대한 기록이 편년체로 남아있다. 기록에 참여한 사관은 예문관의 봉교(奉敎 정7품) 2인, 대교(待敎 정8)2인, 겸열(檢閱 정9) 4인이다. 품계는 낮지만 이들은 조정 대소사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왕과 조정대신들의 국사논의를 기록하여 당대 왕이 사망하면 '시정기(時政記)'와 '사초(史草)'를 자료로 하고 『승정원일기』, 각 「등록(謄錄)」에 기록한다. 남명관련 실록 기사는  중종, 명종, 선조, 선조수정, 광해, 인조, 현종, 현종개수, 정조실록 등 약 106조에 달한다.
 
 그 기록은 1540년(중종 35년) 7월 15일(을사)조에 처음 등장하면서 1798년(정조 22) 10월 12일(임인)조 까지로 생존시기의 기사가 2/3이상이다. 이중에서 주목할 기사는 남명이 입조(立朝)와 관련하여 불사(不仕)에 관한 상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여기서 남명이 당대를 직시한 현실대응 자세와 사람 됨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당시 사관들은 남명을 특출한 존재로 보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함과 동시에 사실에 충실하였다. 남명이 조야(朝野)에 처음 알려진 것은 그의 출사(出仕)에 관한 1538년(중종 33) 38세 때 헌능참봉 벼슬이 제수되면서(병조참지 이림과 대사언 이언적 추천) 곧이어 주부 벼슬, 155년 10월 11일 (55세) 단성현감등을 모두 거절하면서 이해 '을묘사직상소(乙卯辭職上疏)'를 올렸다.

 이 상소는 당시 나라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화제가 되어 사림 선비의 중심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남명의 극렬한 비판적 사직 상소가 왕에 대한 불경(不敬)으로 비칠수 있다는 퇴계의 걱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567년과 1568년(무진)5월 26일 '무진봉사', 1571년(신미) 5월 15일 종친부 천첨(정4)을 제수 받고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는 재야 유림들에게 출처(出處)가 분명한 선비 자세를 촉구하는 깨우침을 주었다.

 여기서 남명이 거주하는 지방 유림들의 생각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1552년(명종 7년) 3월 9일(신묘)

 "경상도 관찰사 이몽량이 초계에 사는 전 전옥서 참봉 이희안이 삼가에 사는 벼슬하지 않은 조식을 추천하였다. 또한 청렴하고 근실한 고을 원들이 상주목사 전팽령, 영천군수 김취문, 지례현감 노진을 추천하였다. 조식은 사람이 청렴하고 정직하였으며 형제들과 함께 살면서 네 것 내 것을 가리지 않았다.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다. 부모의 3년 상을 입는 동안 상복을 벗은 적이 없었으며 집에 곡식이 없어도 태연하였다."

 사관은 부언하기를 「이때 천거한 인물들을 보면 학문과 품행이 옛 사람 속에서 찾아도 흔치않다. 기묘년(기묘사화)이후 선비의 기세가 지락되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학문을 꺼리었으므로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을 존경할 줄 몰랐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인재는 다른 시대에서 빌려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우애 있는 사람이 참으로 성의로 구한다면 재주와 품행을 겸비하고 학문에 해박하여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고 도를 지키며 이속과 녹봉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이뿐이겠는가」

 이희안과 남명을 추천하는 명분이 당연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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