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숙 문학박사/창원대 외래교수

이홍숙 문학박사/창원대 외래교수

 조순남의 내방가사 <김승태만세운동가>는 1919년 4월 12일부터 1920년 4월 24일까지 김해 장유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을 기록한 것이다. 나라가 일제에게 강제로 침탈당하자 백성들의 울분은 극에 달하였고 그 울분의 폭로는 3·1일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이 주권을 찾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궐기한 것이다.
 3·1절을 기점으로 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나갔고 김해지역 여기저기서도 만세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장유의 만세운동은 그 어느 지역에서 보다 격렬하였던 바 가담자 세 분이 현장에서 순국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의 기사를 보면 주재소가 불타고 참가자들이 던진 돌이 비처럼 내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격렬했던 만세운동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 장유에서 전해오는 <김승태만세운동가>이다. 제목이 정확한지는 다시 찾은 원본을 통해 밝혀져야겠지만 임시로 이 제목을 쓰고 있다.

 <김승태만세운동가>의 저자는 김승태 애국지사의 어머니 조순남(趙順南) 여사다. 조순남 여사는 1860년생이다. 간송 조임도의 후손 趙禧秀(조희수)의 3녀로 태어나서 1878년 열아홉살에 장유의 용덕(지금의 내덕) 金鐘煥(김종환)과 혼인하였다. 조순남 여사는 선조이신 조임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이다. 그의 소장품 중 '함안조씨가예집 咸安趙氏家禮集'이 손때가 묻은 채로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조임도(趙任道)는 조선 중기(1585-1664)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활약했던 인물이다. 호는 澗松(간송)이고 문집으로 <간송집 澗松集>이 전해 온다.

 조순남여사는 내방가사를 짓게 된 계기를 일제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여 당시의 무계만세운동을 낱낱이 기록하여 후세에게 길이 남기고자 한 것에 있다고 밝혀 두었다. 요약하자면 유교사상에 힘입은 애국심에서 이 가사를 지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선조의 유교정신을 본받아 애국심의 발로에서 가사를 지었다는 증거다.
 
 내방가사에서 조순남여사는 아들 김승태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에 앞장서도록 독려하였고 그 아들을 통해 본인이 가지고 있던 애국심을 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당시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 방식에 대한 의미이고 하나는 기록이 갖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실제 만세운동 현장에 많은 여성이 참여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참여했던 사실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조순남여사와 같이 기록으로써 역사적 현장을 남긴다는 것은 여성들의 독립운동방식의 한 사례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조순남 여사는 독립운동가에 등재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기록’의 가치다. 조순남의 <김승태만세운동가>의 기록적 가치는 기록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말한다. 내방가사라는 장르의 특성은 저자가 여성이라는 점, 한글로 작성되어 있다는 점 등에 있다. 이 자료는 1919년 무렵 김해 장유의 한글표기 및 표현 나아가 여성작가의 표현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그것도 만세운동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여성이 지니고 있는 섬세한 필치로 써놓은 것이라는 점에서 기록물로서 지니는 문화재적 가치는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일본과의 역사 분쟁에서 기록적인 측면에서 다소 열세라는 인상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1919년 4월 12일부터 써내려간 이 내방가사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한 분명한 기록물이다.

 최근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은 역사적 기록물 <김승태 만세운동가>를 통해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다.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기록을 후세에 남겨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조순남 여사가 독립유공자로 반드시 지정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일제의 만행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 과거에 저지른 만행을 몇 푼의 돈으로 해결하려다 실패하자 경제적 만행으로 치닫고 있다. 조순남 여사의 내방가사 <김승태만세운동가>를 다시 볼 수 밖에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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