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장/ 남명학 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장/ 남명학 박사

 남명이 산해정에서 정착하여 몇 해 지난 44세 때(1544) 6월 외아들 차산(次山)을 잃었다. 위로 외동 딸은 일찍이 김해 만호 김행(金行)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겨우 9살로 무척 사랑하였다.

남명은 슬픈 나머지 시를 지었다(喪子).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靡室靡兒僧似我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           無根無帶我如雲
 한평생 보내면서 어쩔 수 없었는데                 送了一生無可奈
 여생을 돌아보니 머리 흰눈처럼 어지럽도다.         餘年回首雪紛紛

 적막한 산속에서 외로이 서책만 보며  가끔 먼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아들을 잃은 슬픔에 허전한 마음 달랠 길 없어서 눈물 흘리며, 슬픔에 젖어 고달픈 인생살이 정 붙일 곳 없으니, 늙기도 빨리 오는 듯 흰머리가 해풍에 날리고 있다. 선비는 외롭고 고독하다.
 절집에 있는 스님은 부처만 의지하고 지내지만, 이내(남명) 몸은 이제 누구를 의지하고 지낼꼬...그 심정을 보는 듯 느낌이 온다.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 외로운 구름이나 다를 바 없다는 심정이다.
 
 차산은 날 때부터 범상치 않아서 소년이 되어서는 바람과 비를 부르는 도술이 있었다. 이에 남명은 아들이 도술로 인해 세상을 그르칠까 염려되어 산해정 부근에 굴을 파고 감금 하였다.차산은 빠져나오려고 하면 산이 꿈틀하여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차산은 어른 보다 지혜롭고 영리하고 재주가 많아서 박명한 건가. 뒷날 차산이 죽고 나서 그의 이름을 따서 동네에서 ‘조차산 曺次山’이라고도 하고 ‘차산등’이라고도 하였는데 언젠가부터 ‘돛대산’으로 불렀다.(김해지명변천사)  이산이 2002년 4월 15일 중국민항기가 추락한 바로 그 산이다. 실로 희안한 일이다.

남명이 남긴 널리 알려진 시조 두 수를 감상해본다.

   두류산 양단수

두류산 양단수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녕(山影)조차 잠겼으랴
아이야 무릉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삼동에 베옷입고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만은
서산에 해 진다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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