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장/ 남명학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장/ 남명학박사

 남명이 산해정(山海亭)에 강학처를 정하고 잠시 세상사를 잊고 공부에 전념할 적에 친구 이준경 영의정이 보낸 심경(心經)을 31세 때 받고서 매우 기뻐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친구 송인수가 보내준 대학(大學)을 받았고, 44세 때 이림(李霖 1495~1546)이 심경을 보내 주었다. 친구로부터 책을 받고는 고맙다는 서찰을 보내고 책 후면에 자신의 심정을 꼭 적었다.
 

 당시 가난한 선비에게 귀중한 책 한권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행복했으리라고 짐작된다. 보통 사람 같으면 책보다는 보석 같은 물질을 선호하지만 공부하는 선비 에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선물이다. 
 《心經》은 송나라 학자 진덕수가 경전과 도학자들의 저술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아 1234년에 편찬한 수양서. 수록된 내용은 먼저 경전에서 뽑은 것으로 ≪서경≫(1장) ≪시경≫(2장) ≪역경≫(5장) ≪논어≫(2장) ≪중용≫(2장) ≪대학≫(2장) ≪예기≫ 악기(樂記)편(3장) ≪맹자≫(12장)의 29장이 실려 있고, 다음에 송나라 도학자들의 글로는 주돈이의 <양심설 養心說>과 ≪통서 通書≫ <성가학장 聖可學章>, 정이의 <사잠 四箴>, 범준(范浚)의 <심잠 心箴>, 주희(朱熹)의 <경재잠 敬齋箴> <구방심재잠 求放心齋箴> <존덕성재잠 尊德性齋箴>으로 7편이 실려 있다.

 ≪심경≫은 16세기 중엽인 중종 말, 명종 초에 김안국(金安國)이 이를 존숭하여 그의 문인 허충길(許忠吉)에게 전수한 데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남명은 李霖이 보내준 《심경》을 받고 책 뒤에 적었다. 이림(1501~1546)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중망(仲望). 할아버지는 이계통(李季通)이고, 아버지는 한성부좌윤 이세응(李世應)이며, 어머니는 김미(金楣)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를 비롯하여 정자·승정원박사를 거쳐, 부수찬에 이르렀다.

 성격이 강직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으로, 이조정랑 재임 시에는 사간원으로부터 무고한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대사간 재임 시에는 동궁(東宮)에 불이 났는데, 윤원형(尹元衡)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여론이 분분하자, 임금의 총애가 한쪽으로 치우쳐 일어난 일이라는 소를 올려 윤원형 일파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문장 역시 뛰어나 1541년(중종 36) 동지사(冬至使) 허자(許磁)와 함께 진위사(進慰使)로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545년(인종 1)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임(尹任)·유관(柳灌)과 연루되었다는 윤원형 일파로부터의 모함을 받아 곤장을 맞고 의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사사(賜死)되었으나 뒤에 복직되었다.

 남명은 이림에 대하여 "내 친구 이림은 어질고 존경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됨이 내면은 얼음을 담은 옥항아리처럼 깨끗하고 맑으며, 외면은 옥색같이 곱고 부드럽다"고 술회하면서 당시 윤임 일당에 의해서 아까운 선비가 희생된데 대하여 매우 안타깝게 여기며 이림이 후사가 없어서 학문에 독실하고 실행에 지극한 정성을 가지고 있었던 모습을 우러러 기억해 줄 사람이 없음을 자신의 처지(당시 외동아들 차산을 9살에 잃은 것)와 같아서 소중한 서책은 가보로 후대까지 전해지기를 바라는 선비의 소박한 심정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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