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

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 / 정범준 지음 / 알렙 / 282p / 1만 4천 원

 처음 텔레비전이 집에 들어오던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텔레비전은 문이 달린 상자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 문은 작은 열쇠가 있어야 열 수 있었다. 열쇠는 부모님이 가지고 있었다. 텔레비전 방영이 시작되는 시간이면 나와 동생들은 어머니가 텔레비전 문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그 문이 열리면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흑백 텔레비전으로 방송을 보던 그 시절, 아직 기억한다. 책 제목이 말해주는 그 신기한 세상은 여전히 '테레비'라고 불러야할 것 같다.
 대한민국 방송역사에서 흑백 텔레비전 시대는 1980년 11월 30일로 끝났다. 방송통폐합에 의해 TBC동양방송이 마지막 고별 방송을 끝으로 사라진 날도 11월 30일이다. 다음날인 12월 1일부터 각 방송사는 컬러 방송을 송출했다. 이 책은 '사라진 방송사들'에 관한 기록과 추억을 함께 엮었다. 흑백 텔레비전에 대한 아련한 추억은 물론이고, 초창기 방송인들이 척박한 환경에서 일구어낸 치열한 역사를 들려준다.
 
 TV방송 초기에는 거의 모든 방송이 생방송이었다. 카메라, 스튜디오, 조명 시설 하나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려, 드라마가 생방송이었다! 배우들의 동선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를 미리 잡아 약속된 장면을 연출해야 했다.

 그래서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이면 스튜디오는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그 힘든 시기를 거쳐 사회가 발전하고 제작 환경이 좋아지면서 일일연속극이 인기를 얻었다. 일일연속극을 만들기만 하면 보는 수준이었다.

 1970년대에 방영되었던 <아씨> <여로> <딸> <새엄마> 등의 드라마는 그야말로 온 국민을 텔레비전 앞으로 모이게 했다. 1972년에는 하루에 무려 5개의 일일연속극이 편성되는 일도 벌어졌고, 재탕/삼탕 편성, 일일극 홍수, 과도한 광고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정부가 일일연속극에 대해 규제를 할 정도였다. 그리고 탤런트들은 새로운 스타로 부상했다.

 1970년대 후반, 동아일보에는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더니 남자아이들은 '600만불의 사나이', 여자아이들은 '원더우먼'이 장래 희망이라고 답했다"는 설문조사가 보도됐다. <6백만불의 사나이>가 방영 중이던 1977년 9월 2일에 '6백만불의 사나이'를 흉내 내려던 한 남자 어린이가 서울 천호대교에서 뛰어내려 추락사한 사건도 발생했다. 이 때문에 <6백만불의 사나이>는 'TV공해'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자아이들은 겨울이면 원더우먼이 인쇄된 부츠를 사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이 책은 흑백 텔레비전의 시대를 풍미했던 주요 방송 프로그램과 인물, 방송 일화, 방송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의 양상과 문화를 다룬다. 동시에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전해준다.

 만화 한 편 보려고 텔레비전이 있는 친구에게 딱지나 구슬을 갖다 바치던 시절, 온 동네 사람들이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모여서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의 박치기 한 방에 동네가 떠나가라고 환호성을 질렀던 그 시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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