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지정기념물 제151호

 

김해시 장유면 무계리(장유면 316번길 18-34) 소재 '무계리 지석묘'. 경상남도 지정기념물 제151호다.


 경남 지정기념물 제151호
 큰 규모 지배계층 인물

 사람들 낮잠 청한 자리
 '광석 바위'라 불려와


 지석묘(支石墓). 고인돌을 한자 학술용어로 이렇게 부른다. 고인돌은 말 그대로 '돌을 고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멘이라고도 한다.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무덤을 만들 때 주검만을 묻지 않고 토기나 석기, 청동기 등의 다양한 유물을 넣기도 했다.
 그래서 지석묘는 그 무덤을 만들던 시대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된다. 더군다나 지석묘는 박물관 같은 전시공간이 아니라 자연 현장에서 만날 수 있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산이나 건물을 보는 것처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고인돌은 거의 청동기 시대 유적이다.

 지석묘는 전 세계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특히 한반도 전역, 중국 동북 지방과 일본 큐슈 지방에도 많이 분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수의 지석묘가 발견됐다. 현재까지 남한에서 3만여 기, 북한에서 1만 기에서 1만 5천 기 가까이 발견됐다. 이 숫자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는가. 세계 지석묘의 40% 이상에 해당하는 수이다. 우리나라를 '고인돌 왕국'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전남의 고창·화순·강화 지역의 지석묘 유적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김해에도 지석묘가 있다. 김해시 장유면 무계리(장유면 316번길 18-34)에 경상남도 지정기념물 제151호인 '무계리 지석묘'가 있다.
 
 장유의 옛 모습만 기억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장유를 보면 그 변화에 놀란다. 무계리는 대청천과 능동천, 피내천 등 많은 물길이 지나가는 땅이었다. 그래서 장유지역에서 가장 넓고 비옥한 평야로 논농사가 주를 이루었다.

 그 퐁요로움은 무계리를 장유의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무계리는 1900년대 말부터 교통, 행정, 교육, 경제 중심지로 장유 1번지라고 불렸다. 현재의 무계리는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옛 모습을 찾기 힘들다.
 
 무계리 지석묘는 대청천 옆 광석마을의 마을회관 근처에 있다. 광석마을이라는 이름도 이 지석묘에서 유래했다. 이 마을에서 자란 사람들은 지석묘를 '광석바위'라고 부르며 자랐다. 지석묘 옆에는 오래된 고목이 있다. 고목이 지석묘를 덮어주는 듯도 하고, 지석묘가 고목의 뿌리를 든든히 지켜주는 듯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큰 나무와 큰 바위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여름이면 나무 그늘 밑 바위 옆에 누워있기도 했고, 모심기와 농사일에 지치면 이 곳에서 달디 단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지석묘가 익숙하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은 놀라기 마련이다. 활기찬 도심이 된 장유, 장유의 중심이었던 무계리의 마을 한가운데를 걸어가다가 거대한 지석묘와 마주서면 잠시 멍해진다. '집채 만 한 바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눈으로 보는 기분이 든다. 무계리 지석묘는 현재 김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지석묘 가운데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예전처럼 현재도 주민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있지만, 별도의 석축을 쌓아 지석묘와 고목을 보호하고 있다. 눈으로 확인되는 지석묘의 모습은 거대한 상석이다. 상석의 규모는 길이 6.1m, 폭 2.9m , 두께 1.1~1.3m이다. 남북방향으로 길게 놓여있다. 상석 아래에 굄돌을 갖춘 남방식 지석묘로 추정된다. 상석의 북쪽 끝부분은 약간 들려 있고. 나머지 부분은 흙과 돌로서 메꾸어져 있다. 남방식 지석묘로 생각되나,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하부구조를 확인할 수 없다. 부근에서 1964년 11월에 조사된 또 다른 지석묘와 동일한 구조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무계리 지석묘는 21세기의 김해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청동기 시대 죽음의 형태이다. 저 엄청난 크기의 바윗돌은 어떻게 저 자리에 있는 걸까.

 지석묘를 축조할 때 가장 어렵고 중요한 작업은 상석의 채석과 운반이다. 실험고고학에 의하면 1톤의 돌을 1.5킬로미터 옮기는 데 16~20명이 필요하며, 32t의 큰 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는데 200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수십 t에서 수백 t에 이르는 지석묘를 세우려면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중장비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저 거대한 바위를 옮겨 왔을까. 처음부터 저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어디에선가 왔을 게 분명하다.

 까마득한 옛날로 돌아가 보자. 무계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았겠지만,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우선 바위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쓸 만한 바위를 찾아내거나 커다란 암반에서 떼어내는 방법으로 바위를 구한다. 암반에서 떼어낼 때에는 바위 결을 따라 난 조그만 틈에 깊은 홈을 파서 나무말뚝을 막고 물에 적시는 방법을 사용한다. 물을 먹고 불어난 나무는 바위를 가른다. 자연의 이치와 힘을 활용한 지혜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떼어낸 바위를 옮기는 작업 역시 만만치 않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도 손으로 들어 먼 거리를 이동하며 옮기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큰 통나무 여러 개를 깔아놓고 그 위로 바위를 올리고 통나무를 굴려가며 옮겨야 한다.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오늘날의 건축현장처럼 중장비와 각종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의 힘으로 하자면 이런 방법을 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어쨌든 지석묘의 암벽에서 바위를 떼어내는 고도의 기능을 가진 석공이 필요했고, 좀 더 수월하게 운반하고, 받침돌 위에 정확하게 올리는 토목설계의 기술이 필요하다. 엄청난 무게를 가진 지석묘의 축조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생각할 수록 어떻게 만들었을까 상상하게 되고, 상상할 수록 궁금한 점은 점점 늘어난다.

 지석묘를 축조할 때 필용한 인력 동원은 어떻게 했을까. 규모가 큰 지석묘는 지배계층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야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무계리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큰 사회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계리 지석묘는 얼마나 오랜 세월 저 자리를 지켰을까. 한 나라가 일어섰다가 지고, 또 다른 나라가 일어서고 지고, 길고 긴 역사가 흐르는 세월을 보았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오는 모습, 조금씩 성장하며 여물어 가는 삶, 이윽고 생을 마치는 것 까지 수많은 사람의 인생도 보았을 것이다. 새 순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고, 비 오고 눈 내리는 날들. 헤일 수 없이 긴 세월을 한 자리에서 견뎌냈을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 김해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고 묻고 싶다. 그리고 지석묘에 가만히 귀를 대고 그 답을 듣고 싶다.

 죽음의 형태로 남아있는 무계리 지석묘, 그러나 이제는 삶의 한 형태로 김해에 있다.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우리의 삶을 지켜볼 것이다.

 박현주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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