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 남명학 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
남명학 박사

 지난 호에 이어 이준경에 대하여 좀더 살펴본다. 진정한 성리학적 도학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조선 중기 무렵부터이다. 성리학적 이상을 현실 정치로 구현하려던 사림들은 연산군 시대부터 중종, 명종 대까지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당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사림들은 훈구파들을 몰아내고 정치권력을 잡았다. 

 그 혼란한 과도기에 이준경(李浚慶)이 있었다. 그는 중용과 포용의 리더십으로 조선에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이준경 형제는 귀양에서 풀려났다. 갈 곳이 없었던 이준경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형과 함께 외가에 얹혀살게 되었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은 다행히 참화를 면했고, 적자인 아들도 없어서 이준경 형제가 의탁할 만했다. 외할아버지는 이들 형제의 사람됨을 보고 이준경의 어머니 신씨 부인에게 말했다.

 신씨 부인은 아들들에게 《효경》과 《대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공부를 가르칠 때마다 늘 이 말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는 화를 당하고도 꿋꿋하게 버티며 아들 형제를 가르친 어머니의 덕으로 이준경은 학문을 벗하며 바르게 성장했다. 그는 열여섯 살 때부터 사촌 형인 이연경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준경은 이연경에게 배울 때 조광조의 도학에 대해 듣고 영향을 받았다. 이로써 사림파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준경이 관직에 들어선 때는 기묘사화 이후 개혁정치에 실패한 중종이 훈구 세력과 척신들에게 휘둘리며 정국이 혼미한 때였다. 시시콜콜 도학의 정치 이념을 들이대며 훈구파를 몰아세우던 사림파를 눈엣가시로 여긴 훈구파는 기묘사화 이후에도 종종 옥사를 일으켰다.

 사림이었던 이준경 역시 그 와중에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견제를 받아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선대에 사화의 잔인함을 몸소 체험했던 이준경은 자중하며 독서와 수양으로 성리학에 매진함으로써 김안로가 제거된 후 다시 등용될 수 있었다. 도교의 색채가 짙은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등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을 둔 정치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이준경은 멀리 한적한 궁벽한 곳에 살고 있는 어릴 적 친구 남명에게 살뜰한 정을 보이며 道義之交를 나누었다. 자신은 영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바쁜 가운데도 잊지 않고 해가 바뛰면 책력(달력)을 보내주고 가난한 친구를 위로하며 정을 나누는 서찰은 '진정한 벗'이 어떤가를 시사해주고 있다. 남명이 병으로 시달리자 약재를 여러 가지 보내준 것은 많은 돈을 보내준것과 다름없다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말하고  정승으로서 체모를 높게 지켜 아랫사람들이 私的으로 붙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는 말도 덧붙였다.(문집. 書,答李相國原吉書)

  이원길이 책력을 보낸 것을 감사하며(謝李原吉送曆)

 동쪽 시내를 향해 새 책력 부치지 마오              莫向東溪寄曆新
 五行운행하는 것 산골 사람은 기억 못하나니         山人不記五行新
 오직 창 너머에 매화가 있어                        隔窓唯有梅花在
 눈 헤치고서 해마다 이른 봄을 알린다오.            擺雪年年報早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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