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 남명학 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
남명학 박사

  남명이 어릴 적 부친을 따라 한양에서 같이 공부한 절친한 친구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 과의 신교(神交)는 당대 모든 이의 부러움을 샀다. 본관이 廣州. 자는 原吉. 오랫동안 영의정을 지냈다.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정사에 임하여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사림파의 급진적 개혁에 반대하였고, 신진 사림(훗날의 동인)과 기성 사림(훗날의 서인)의 분쟁을 조정하다가 신진사림의 정적(政敵)으로 지목되어 이이, 기대승 등의 공격을 받았다. 이이와 심하게 갈등하던 그는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는 발언을 하여 그와 척을 지게 된다. 죽기 직전 붕당의 폐단이 나라의 혼란이 되리라는 유언을 올렸다가 이이의 공격을 받았으나, 유성룡 등이 그를 변호하여 처벌을 면했다.

 이연경과 조광조의 문인이다. 시호는 충정(忠正).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추서되었다.
 할아버지는 이세좌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이다. 할아버지 이세좌는 성종 때 승정원 좌승지로 폐비 윤씨를 사사하라는 명을 받고 금부도사와 함께 사약을 들고 폐비 윤씨를 찾아가 사사를 목격했는데, 이때 그의 할머니는 우리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면서 염려했다 한다. 이준경이 6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할아버지 이세좌와 아버지 이수정이 사사되었다.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형 이윤경과 함께 괴산으로 유배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16세 때부터 이연경과 조광조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이연경과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정여창으로 이어지는 영남 사림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관직으로는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승정원승지, 형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조판서로 승진하여 되돌아왔고 대사헌,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우찬성, 좌찬성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원길이 보낸 '심경' 끝에 씀

 나의 벗 광릉(廣陵 지금의 경기도 광주) 이 원길이 이 책을 주면서 스스로, "나는 비록 착하지는 못하지만 남이 착하도록 도와주려는 생각은 진실로 앝지않다. 이 마음을 잘 미루어나가면 비록 나라를 나누어 주어더라도 저울눈처럼 자잘하게 여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처음 이 책을 받고는 황송하고 두려워서 마치 산더미를 짊어진 듯하였다. 내가 항상 스스로 경계하여 "언행을 신의 있게 하고 삼가며, 사악함을 막고 정성을 보존하라.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으면, 움 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 이 부분 남명이 책상 앞에 써놓고 깨우치려고 노력한 자신을 경계하는 문구)"라는 말을 벽 위에 써 두었으나, 마음은 늘 楚 나라와 越나라사이처럼 아득히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이 아마 마음이 죽지 않게 하는 약이리라. 아침저녁으로 일상생활에서 쓰기를 스스로 마지않는다. 노력하여 게으르지 않도록 하라 顔子와 같이 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묘년(1531) 10월 夏城(창녕의 옛 이름) 曺楗仲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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