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 남명학 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
남명학 박사

 남명은 평소 절친한 벗이 6명 있었다. 이들은 삼족당 (三足堂) 김대유(김대유,1479~19555),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1506~1559),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1504~1559), 청송(聽松) 송수침(宋守琛, 1493~1564),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자함 신계성(申季誠, (1499~1562) 등이다. 이들은 모두 남명보다 앞서 세상을 뜨자 남명은 이들의 발인(發靷)을 맡았고  비명(碑銘)도 지었다. 이 중에서 자함은 남명이 산해정에서 강학을 할 때 자주 만나서 도의로 교제한 인물로 사후 남명과 함께 신산서원에 배향 된 유학자이다. 자함에 대한 기록은 남명이 지은 〈처사신군묘표(處士申君墓表)〉가 가장 구체적이므로 약술하여 옮긴다.

 "공의 휘는 계성이고 자는 자함이다. 향년 64세이고 임술년 1562년(명종 17)에 밀성 동촌 장선리에 장사지냈다. 신씨의 본관은 평산이고 비조(鼻祖) 숭겸(崇謙)은 고려 태조 원훈(元勳)이다. 고려. 조선 조정에서 벼슬하였다. 고조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좌의정에 추증 된 자수(自守)이다. 증조부 윤원(允元)은 통훈대부 군자감정을 지냈으며, 조부 승준(承濬)은 생원으로 서른 이전에 요절하였다. 아버지 탁(倬)은 출사하지 못하였으며, 부윤 손영유(孫永裕)의 손자 순무의 딸과 혼인하여 공(자함)을 낳았다. 공은 찰방 이철수(李鐵壽)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큰 딸은 남명 제자 생원 김담수(金聃壽)와 혼인 하였다. 공은 학문으로 몸가짐을 단정히 하여 시종 변함이 없어서 아무도 겨룰 사람이 없었으며, 법도로 집안을 다스리고 한 고을에 모범이 되어 사람들이 감히 트집을 잡지 못했다."

 우리 고을에 인재가 많은데      
 그 중에 신군이 첫째라네        
 마음가짐은 엄숙하고             
 행동거지는 꼿꼿하였네           
 선현들을 사숙하다가             
 송당의 문하에 들어갔네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끼친 향기가 퍼져나가네          

 송당은 박영(朴英, 1471~1540)을 말하며, 본간은 밀양, 자는 子實. 양녕대군의 외손자로 문무에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담 너머 물건을 쏘아도 반드시 맞히므로 아버지가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영(英)이라 하였다. 1487년(성종 18) 이세필(李世弼) 막하(幕下)에 있을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1년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겸사복(兼司僕)이 되고, 9월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항상 자신이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에 1494년 성종이 별세하자 가솔들과 함께 고향(구미)으로 가서 낙동강 변에 집을 짓고 송당(松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붕(鄭鵬)·박경(朴耕) 등을 사우(師友)로 삼아 『대학(大學)』과 경전을 배워 1509년(중종 4)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듬해 삼포(三浦)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昌原)에 부임하였다. 1514년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다. 1518년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같은 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소환돼서 임명되었으며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역임하였다. 그 뒤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황간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당집(松堂集)』·『경험방(經驗方)』·『활인신방(活人新方)』·『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 등이 있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