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봄 봉사단 '김해의 시작'

강산문화연구원 산하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 활동에 참여한 40여 명 학생과 시민이 구지봉에서 만난 일본인 관광객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훤히 내려보이는 시가지에 탄성
 한석봉의 '구지봉석(龜旨峰石)'

 구지가, 한 세상을 여는 노래
 소박하나 위엄있는 수로왕비릉

 (재)강산문화연구원은 문화재 발굴조사 전문기관이다. 연구원은 산하에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을 두고 매월 김해의 문화재를 찾아가는 활동을 하고 있다. 초·중·고등학생 및 관심 있는 학부모가 참여한다. <김해일보>는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 함께 매월 김해의 문화유산을 찾아가기로 했다. 우리 옆에 있는 유산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름만 알고 있거나, 스쳐 지나가기도 할 것이다. 이번호부터 매월 게재하는 이 글을 통해 김해의 문화재를 함께 알아가자.
 

 역사가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몸속을 흐르는 피처럼 생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역사의 현장이나 흔적을 만날 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만남의 형식이 엄숙하고 진지하기만 하다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편하게 만나고, 만나는 동안 서서히 마음이 뜨거워진다면 좋겠다. 그럴 때 우리 역시 옛 선조들처럼 역사를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의 올해 첫 프로그램 제목은 '김해의 시작'으로, 지난 3월 16일 진행됐다. 김해가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그곳이 '구지봉'이라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구지봉 하면 바로 '구지가'가 떠오른다. 까마득한 고대에 사람들은 구지봉에서 구지가를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에는 그들의 마음이 담길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노래가 자신들을 다스릴 참 주인을 맞고 싶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면, 참으로 큰 노래가 아니겠는가. 한 세상을 여는 깊고도 넓은 시가 아니겠는가. 구지봉은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시가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집단 무가인 '구지가'를 백성들이 불렀던 곳이다. 이 곳은 마땅히 김해의 시작이다.

 구지봉은 김해시 가야로157번길 31-16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다. 1983년 8월 6일 경남도기념물 제5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3월 7일 사적 제429호로 변경됐다. 거북이 머리모양을 닮아 구수봉이라고도 불렀다. 도로 건너 편 수로왕비릉이 있는 평탄한 지역이 거북의 몸체이고 서쪽으로 쭉 내민 봉우리의 형상이 거북의 머리 모양 같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구지봉에서 수로왕비릉까지 전체를 멀리서 보면 해반천으로 물을 먹으러 내려오는 거대한 거북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일제는 거북의 목 부분을 잘라 도로를 냈다. 현재는 구지터널로 구지봉과 수로왕비릉이 연결되어 있다.

구지봉 입구에 서있는 구지가를 새긴 비석 '영대왕가비(迎大王歌碑)'.

 구지봉 입구에는 구지가를 새긴 비석 '영대왕가비(迎大王歌碑)'가 세워져 있다. 왕을 맞이하는 노래를 새긴 비석이라는 의미이다. 자세히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기 쉬운 이 비석은 1986년 12월 28일 세워졌다. 비석의 전면에는 한시 형태의 구지가가 새겨져 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만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천천히 읽으면서 옛 가야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짐작해 본다.
 
 비석의 후면에는 수로왕의 탄강설화와 비를 세우던 당시의 사실을 상세히 기록했다. 비석의 하단에는 비석 건립에 힘과 마음을 보탠 이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부산대, 동아대, 동의대를 비롯해 전국 여러 대학의 국문학과 교수들 이름을 볼 수 있다. 구지가는 문헌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우리 시가로, 아직도 학계의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중요한 가치를 지닌 노래인 만큼 고전문학 연구자들뿐 아니라, 현대문학 연구자들도 나섰던 것이다.

 구지봉으로 오르는 길에는 봄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무 가지 끝에서 금방이라도 연록색 어린 새 순이 날 듯 했고, 땅 속에서 꿈틀거리는 에너지가 몸속으로 들어 오르는 듯 기분이 좋았다. "아빠, 이거 예뻐. 나 가져도 되지?" 봄 꽃망울 터지는 듯 앙증맞은 목소리에 돌아보니 여자아이가 엎드려 솔방울을 줍고 있다. 술방울 네 개를 주운 아이의 두 손이 가득하다. 얼굴도 환하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 봉사단 언니 오빠들을 따라다니는 중이다. 훗날 아이는 이 봄날의 소풍이 얼마나 크고 환했는지 오래 기억할 것이다.

 구지봉에 선 봉사단 아이들이 김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며 탄성을 질렀다. 해반천과 대성동고분군 등 옛 가야의 중심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기원전 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남방식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은 5∼6개의 짧은 받침돌 위에 지름 2.5m 정도 되는 덮개돌이 덮여 있다. 그 위에 새겨진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는 글은 한석봉이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소나무가 호위하듯 둘러선 구지봉 정상부는 고즈넉하고 엄숙했다. 이 곳에서 구지가를 불렀던 장면을 상상해보면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아득한 옛날, 아직 왕이 없었던 가야의 백성들이 여기에서 노래를 불렀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노래, 죽음을 극복한 삶의 노래,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노래, 하늘에서 내려온 왕을 맞는 노래였다. 한 세상을 여는 노래였다.

 봉사단 아이들 곁으로 산책 나온 시민들이 지나가는가 싶었는데, 일본말이 들려왔다. 부산에 연극 공연을 하러온 일본 배우들이 김해의 문화유적 탐방길에 나선 것이다. 일본 배우들은 토요일 오전에 문화유적을 찾아온 김해의 청소년들을 보았고, 김해 아이들은 일본인들을 보았다. 서로가 "와, 대단한데?" 하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들은 한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일본인들은 수로왕비릉을 먼저 보고 온 참이다. 그들이 가야의 역사를 좀 더 알고 가기를, 그리고 일본이 거북의 머리와 몸체를 잘랐음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 활동에 참여한 40여 명이 허황옥 수로왕비릉 정화활동을 하고 있다.

 봉사단의 발길은 수로왕비릉으로 이어졌다. 구지터널 위를 걸어 수로왕비릉으로 가면, 능 아래로 시야가 넓게 펼쳐진다. 깨끗하게 정비된 능과 그 일대 위로 봄 햇살이 거칠 것 없이 내려왔다. 수로왕비릉은 사적 제74호이다. 지정면적 3만 2천920㎡. 무덤의 지름 16m. 높이 약 5m에 이른다. 대형의 원형 토분이나 특별한 시설은 없다. 능의 전면에는 축대를 쌓았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다. 경내에 파사석탑이 있다. 인도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가 수로왕과 혼인을 하기 위해 올 때 이 탑을 배에 실어서 풍파를 진정시켰다고 전해진다. 수로왕비릉은 화려하지 않다. 소박하나 위엄이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경건해진다.

 여행플래너 최정규 씨가 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이라는 책이 있다. 서울부터 제주도에 이르는 1001곳의 명소를 소개한 책이다. 그 책에서 구지봉과 수로왕비릉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이 두 곳은 함께 보아야 한다. 가야 건국신화와 관련하여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라는 것 말고도, 천천히 걸으며 가야의 역사를 온 몸으로 느껴보기에 좋은 장소이다. 사계절 언제 오더라도 멋진 풍경을 보여줄 것이다, 그중에서도 생기 넘치는 봄날, '김해의 시작'을 찾아가보길 권한다.
 

박현주 북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강산문화연구원의 도움으로 작성됐습니다.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 문의/(재)강산문화연구원 055-337-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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