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인도의 의사인 이틴 트라시는 1999년 깨달음의 과학(The Science of Enlightenment)이라는 책을 내면서 깨달음에 대한 과학적 정의를 시도했습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깨달음은 '자아가 있다는 환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아가 없음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부처가 연기를 통해 깨달은 것으로 '자아라는 실체가 없음에도 중생들은 무명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틴 트라시는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병들어 죽는 운명을 지닌 사람에게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자아 또는 영혼이 없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명백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지 그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가정을 하고, 거기에 '나'라는 이름을 붙이고 개념화하여 확고한 자아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아를 생각이나 행동의 중심 또는 기준으로 정해놓고 그에 따라 모든 일을 판단합니다. 동시에 '나' 이외의 모두를 '남'으로 구분해 배척합니다.
 
 이것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트라시는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아의 환상에서 벗어난 사람은 '나'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에 대한 배척도 사라져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렇다고 일상을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이해나 결과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필요한 일을 오히려 더 효율적으로 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불교의 무아설과 다르지 않은 주장입니다.

 트라시가 말한 '자아가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남'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임을 아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에서 무아는 이미 거의 상식적인 사고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이성, 감성이 다 망가진 뇌손상 증후군인 사람들조차도 대화를 할 수도 있고 이상한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자아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뇌과학은 철저하게 무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뇌의 어디를 뒤져보더라도 자아가 없더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아를 이야기하는 것이 뇌과학이나 불교만이 아닙니다. 유물론자도 무아를 이야기했습니다. '죽으면 끝이다.' 즉, 자아는 물질이 모여서 만들어진 부산물이며 죽으면 사라진다고 합니다.

 결국 불교와 현대 뇌과학, 그리고 인도고대 전통유물론이 똑같이 무아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아를 이야기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뇌과학과 고대인도유물론은 무아론적 단멸론입니다. 자아가 없고 죽으면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무주의에 빠질 공산이 큽니다. 그런데 불교는 무아론적 윤회론입니다. 자아가 없지만 업식(業識)이 남아 있는 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무아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욕망 제로'를 실현해서 업이 생겨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모든 욕망의 불을 완전히 꺼서 기쁨이나 슬픔이 없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무아를 이야기하면서 윤회와 해탈을 설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진실이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지 2500년이 넘은 지금, 갖가지 달라진 형태의 깨달음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한때 아시아에 머물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로 퍼져 확장이 되었지만, 부처님이 설한 깨달음의 개념은 오히려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깨달음에 대해 제각기 해석들을 하고 떠들어 대고 있습니다. 불교가 들어온 지 1700년이 됐다는 한국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한다는 선종의 거대종단 내에서도 여러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데 마치 찻잔 속의 폭풍과도 같습니다. 그 배경에는 '깨달음이 무엇인가'하는 근본 의문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슬픔은 찬란했던 통일신라와 고려불교가 조선에 이르러 탄압을 받으며 산중불교가 되면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한국불교가 암흑기를 지내오는 동안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왜곡이 진실을 밀어내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간 불교가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것을 모르고, 또 중국에서 태어난 선종의 간화선이 엉뚱한 목표를 추구하는 수행법인 줄 모르고 매달려온 역사의 허망한 참사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직접 설한 '맛지마니까야'에 '부처님은 브라만교 수행자들로부터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와 같은 최상의 선정을 배우고 수행을 했지만, 그것이 바른 깨달음 또는 열반으로 이끌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떠났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상-괴로움-무아'를 바르게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지혜인 것입니다. 뇌과학으로 믿음의 비밀을 밝혀 '믿는다는 것의 과학'을 펴낸 앤드류 뉴버그는 뇌과학의 연구 결과 브라만교를 비롯해 선종 등 여러 종교가 말하는 진리가 부처님의 깨달음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깨달음은 자아가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남 즉, 무아임을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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