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불교는 부처님이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있다는 유신론적인 사상을 타파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불자들에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천당에 있거나, 인격적인 신의 기준으로 우리에게 베푸는 모종의 은총에 그 목적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이 신의 영역에 의해서 결정되고 신의 은총의 범위 내에서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교적인 시각입니다. 불교인들에게 물어야 할 적절한 질문은 '인생은 무엇인가'입니다. 싯타르타 왕자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서원을 세우고 '위대한 출가'를 단행했습니다.

 그리고 무상을 이해하여 '인생은 인연으로 합성된 커다란 행열'임을 깨달아 부처가 됨으로써 그 질문에 대한 명백한 대답을 제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은 무상하기 때문에 그것은 끝없는 변화를 나타내며, 덧없는 경험들의 집합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경험들로 한정 지어진 목적에 끄달리어 현상에 매몰되어 고통을 받기 보다는 근원을 파악하여 이를 깨달아 행복을 추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어떠한 존재도 고통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억만장자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열심히 일하는 개미, 벌, 나비 등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과 '행복'에 대한 정의가 생물의 형태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같은 인간끼리도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는 '행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풍족한 의식주에 만족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수백 컬레의 신발을 가지는 것에 더 큰 행복을 느낍니다. 심지어는 상어 지느러미나 원숭이의 골 요리를 탐닉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의 댓가로 다른 존재의 생명을 빼앗기도 합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소년 시절 멋진 파도타기가 행복이었지만 중년에는 돈과 화려한 경력이 행복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통과 행복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못한 채, 우리 인간들은 수많은 방법과 물질을 이용하여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줄이는데 올인하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휴대용 전화기, 식기세척기, 비데, 비아그라 등도 이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편리한 것들은 사용한 분량만큼 불가피하게 댓가가 따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상되는 고통을 막기 위해 비타민을 섭취하고, 백신과 예방치료에 미리 애를 씁니다.

 싯타르타도 역시 고통의 뿌리를 자르려고 출가하여 고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혁명을 도모하거나, 새로운 경제환경을 만드는 등의 해결책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싯타르타는 열린 마음으로 고통을 탐구하였고, 진리를 향한 명상을 통해 고통의 뿌리가 우리의 마음, 즉 업식(業識)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실제로 마음이 업식에 갇혀 있으면 '고통'인 것입니다. 모든 업식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이기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탐심(貪心)이 치솟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업식은 특별한 원인과 조건들이 결합하게 되면 거기에 상응되는 마음이나 감정들이 일어나는데, 그러한 감정을 수용하는 순간, 감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제정신을 잃고 깨달음을 놓치게 됩니다. 진심(嗔心)과 치심(痴心)이 성성하게 됩니다. 명상이 깊어짐에 따라 싯타르타는 모든 현상에 내재한 본질적으로 환영과 같은 특성을 보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왕궁에서의 생활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왕궁 생활의 모든 매력적인 현상들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휩쓸리는지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생활은 전부 합성된 실체 없는 환영같은 현상임을 보았습니다. 결국 현상이 아닌 근원을 파악한 싯타르타는 깨달아 부처가 된 것입니다.

 "인도 어느 마을에 큰 연못이 하나 있었다. 이 연못은 심한 가뭄이 와도 잘 마르지 않아 소나 양을 치는 목동들이 물을 먹이는 곳이었다. 어느 날 이 연못에 이상한 풀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물고기들이 죽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나 양도 더이상 이 물을 마시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물은 퍼내고 독초를 뽑아냈다. 겨우 물이 채워지자 또다시 독초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때 이 마을을 지나던 한 늙은 브라만이 독초를 뽑으려 하지 말고 버드나무를 심어보라고 했다. 연못가에 버드나무들이 자라면서 독초는 죽기 시작했다. 다시 연못의 물이 맑아졌다. 소와 양은 예전처럼 그 물을 마시게 되었고 버드나무는 더 크게 자라 새들이 와서 지저귀기 시작했다."

 현상이 아닌 근원을 파악하라는 좋은 사례의 이야기입니다. "어둠이 내리자 수행자들이 이를 물리친다고 이불을 펄럭였다. 이를 본 한 선사가 조용히 등불을 켰다." 어둠을 물리치는 근원적인 방도는 다름이 아니라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불교는 목적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근원을 찾아 나서는 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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