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논설위원

 

한상규 논설위원

 민인호(閔麟鎬 1884~1950)는 산청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일제 강점기에 탁지부 주부를 거처 김해군수(1924~1926)를 지낸 엘리트 관료로서 김해지역 문화발전에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일제통치하에서 군수를 지냈지만 군민을 수탈하지 않고 지역민과 친숙하게 지냈기에 존경받았다.  민군수의 큰형 민용호(閔龍鎬 1869~1922)는 산청에서 출생하여 남명의 정의 정신을 이어받은 인물로,1895년 일본의 자객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1895년 10월 8일 발생하자 전국적으로 반일 의병이 일어났다.

 민용호는 경기도 여주에서 의병군을 조직하여 관동창의 대장으로 강원도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공적은 군수 재직 시 수로왕릉 확장 중수사업으로 현 왕릉을 남산 전역까지 화충 하려고 추진 단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돌연 함양군수로 발령을 받아 이 사업은 중단 하게 되었고 다만 그 공로를 기억하는 비문이 수로왕릉 영내에 있다. 민 군수는 부임하자마자 김해읍지(金海邑誌) 발간을 위해 속수회(續修會)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아 어려운 군 재정에도 불구하고 지역 유림등 지식층에 뜻을 모아 완성하였다.

 허평(許坪) 이 쓴 발문을 보면 그 취지와 과정을 알 수 있다. 그중 일부를 보면, 조선 순조(純祖) 임금 때 부사 심유조(沈有祖)가 조정의 명을 받아 읍지 한권을 수성(修成)하여 군청의 책상에 있었으나 그 후 90여년이 지나도록 속수(續修)하지 못하여 거의 사라질 번 한 것을 보고 개탄한지 오래되었다.

 다행히 군내 여러 사람들이 뜻을 모아 진행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역사와 김해지역의 긍지를 대내외에 표방하려는 취지가 보인다. 발문 중에 "금릉은 옛날 수로왕의 도읍이다. 냇물과 강의 웅장함이 마땅히 큰 선비 뛰어난 덕이 있을 만하다. 하물며 남명 탁영(김일손) 양 선생이 흥기(興起)하고 가르침이 이 고을로 하여금 정절, 충신, 효자, 열녀가 무성하여 서로 바라보게 한 것은 별도로 인물편을 넣었다. 뒤에 이 읍지를 보는 자는 수로왕 천년의 여러 유적의 아름다음을 흠모하여 스스로 힘쓸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읍지에 함허정(函虛亭)과 연자루(燕子樓)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함허정은 연자루 북쪽에 있는데 부사 최윤신(崔潤身)이 세우고 호계의 물을 끌어  연못을 파서 연을 심고 정자를 쌓아 아주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었다. 남명은 여기에 김일손을 거론 하며 시를 지었고 김일손은 유학자의 뛰어난 문장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진솔하게 쓴 기문이 유명하다.

 함허정은 선비와 관원들의 심신 수양처로 인기를 받고 있어서 서민들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 또한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역사로 기억할 만하다. 탁영은 조선 성종 때 관학파에 대비되는 사림파의 큰 스승인 김종직의 문인 김굉필, 정여창과 함께 3대 문인 중에 한 사람으로 영남의 대 선비다.

 그가 지은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죽기 전에 지은 것으로, 항우가 초 의제를 빌어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글이다. 그가 죽은 후, 사관이었던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글을 실음으로써 결국 무오훈척 세력이 파고들었다. 김일손은 자신이 사관이었던 당시 기록하였던 사초에 스승 김종직이 단종을 애도하며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었다. '조의제문'은 중국 진(秦)나라 항우(項羽)가 폐위한 초(楚)나라 의제를 추모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단종을 의제, 세조를 항우에 비유한 것으로, 김종직은 이를 통해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고, 그를 비난한 것이다. 김일손과 남명의 기문이 있는 읍지에 함허정과 연자루에 의 기록을 검토하여 연자루와 함허정 복원에 관심을 모아주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