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불가에서는, 특히 선종의 종파에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화두가 깨달음에 깊이 관여를 하고 있습니다. 당나라 때 한 수행승이 조주(趙州)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없다(無)"고 한 화두를 수행의 도구로 삼아, '일체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를 의심하고, 이 의문을 타파하게 되면 견성(見性)한다고 하는 제접의 방식입니다.

 이 화두를 참선하는 방편으로 제시한 이는 송나라의 대혜(大慧)로서, 당시의 승려와 속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접 방식으로 크게 활용하였습니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십니까?"라는 학인의 질문에 대한 조주선사의 '없다'에 뒤를 이은 답변 "그것은 업식(業識)의 성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유업식성재 有業識性在)."를 잘라버림에 따라 '없다(無)'자 화두가 된 것입니다.

 '업식의 성품'이란 말을 음미해보면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의미는 지금 선종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표현이 됩니다. 그 말은 불성이 있는데 업식의 성품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불성이 없는 것과 같다는 내용입니다. 업식의 성품이라는 뜻을 제대로 음미해 봐야 합니다.

 업(業)이란 의지작용이 수반된 모든 정신적·육체적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의도된 행위는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데, 좋은 의지작용의 결과는 선업이 될 것이고, 나쁜 의지작용의 결과는 악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모든 업은 빠짐없이 업장(아뢰야식)에 저장이 됩니다. 그러므로 업이란 조금 전까지 지은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업의 경향성을 업식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업식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틀입니다. 업식이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업식은 하고 싶은 것을 자꾸 하게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만물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며 언제나 같은 모습이지만 우리의 시선이 온통 업식으로 물들어져 있어서,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편견과 색안경을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업식은 세상을 보는 눈을 덮은 나의 안경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특정한 인식의 틀에 갇히면 모든 사회 현상을 자기의 업식에 따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좌파에 물들어 있는 사람은 좌파의 색안경으로, 보수적인 사람은 보수의 색안경으로 바라보는 경향성을 나타냅니다.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업식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고착화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전의 모든 의지가 수반되었던 그러한 성질들, 즉 업식의 속에 갇혀있을 때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조주는 묻는 사람의 입장을 먼저 간파했습니다. 개와 사람을 구분한 질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또 학인이 불성이 있는가를 질문한 개의 업과 업장은 전생에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의 자기 지식에 갇혀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개 같은 인생에도 불성이 있는가?'를 질문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조주는 업식에 갇혀있으면 불성은 없다는 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여여하고 오직 한가지의 맛이지만 자기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오직 자기 마음에 따라 지옥도 되고 천당도 됩니다.

 자기가 슬플 때는 온 세상이 슬퍼 보이고, 마음이 기쁠 때는 온통 즐거움으로 가득 찹니다. 이처럼 저장 되어있는 업이 어떤 인연으로 업식의 작용에 의해 밖으로 나타나 다시 업을 행하게 되면 그 업식에 따라 습관적으로 끄달리게 되는 경향을 갖춥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면 그 행위가 일단 업이 되어 업장에 저장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인연으로 술을 먹고 싶은 생각이 떠오르게 되면 술을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업식입니다.

 그리고 업식에 끄달려 술을 습관화 하면 술에 젖어 벗어나기가 힘이 듭니다. 업식이란 자유의지가 없는 망상으로 적당한 인연이 이루어지면 튀어나오는데 고통스러울 수록 더욱 끊지 못하는 것이 업식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업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제까지의 행위와 결과와 그 관성 그대로 어제와 같은 삶을 오늘 살면 결코 부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어제와 같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재를 과거의 눈으로 보면 과거 살았던 삶과 현재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미래의 삶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지난 업의 의도와 지난 의지작용 그리고 지난 생각들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단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를 담아내기에 적합한가를 살펴보고, 그리고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가 등의 내 생각의 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바로 내 속에 있는 불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조주선사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말한 의미는 개에게 불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업식에 갇혀있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중생이면 부처가 되지 못한다는 큰 가르침입니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