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탐심

만년필 탐심/박종진 지음 / 틈새책방 / 256p / 1만 5천 원

손글씨를 쓸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부분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는 세상이다. 그래도 필자는 여전히 필기구에 관심이 많다. 연필을 깎을 때 나는 '사각 사각'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 잉크를 모두 소비한 볼펜을 보면 뭔가 많은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하다. 만년필에 잉크를 새로 넣을 때면 설렌다. 필기구를 잡고 힘을 주어 종이 위에 뭔가를 쓸 때, 다른 그 어떤 동물도 흉내 내지 못하는 지적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필자가 가장 감동을 받았던 필기구는 만년필이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 아버지가 만년필을 사주셨다. 만년필을 받았을 때,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고 중학생이구나 싶어 혼자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동생들은 손도 못 대게 했다. 동생들은 감히 만년필에 손을 댈 수 없는 어린 아이니까.

 박종진의 '만년필 탐심'을 보았을 때 주저 없이 펼쳐들었다. 만년필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에 호기심이 폭발했다. 저자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쓰시던 만년필을 보고 매력에 빠진 후, 40여 년을 만년필에 꽂혀서 인생을 바친 만년필 마니아이다. 40년의 세월 동안 틈만 나면 만년필을 찾아 벼룩시장을 헤매거나, 취향에 맞는 잉크를 위해 직접 제조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골방에서 종일 만년필을 써 보고 분해했다.

 만년필을 연구하고, 수집하고, 관련 자료도 모았다. 2007년에 국내 최초로 서울 을지로에 '만년필 연구소'를 열었다. 평일에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주말에는 만년필연구소 소장으로 만년필을 좋아하는 이들과 지식을 공유하고, 직접 만년필도 수리해준다. 2005년부터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를 운영 중이고, 1년에 두 번 '서울 펜쇼'를 열고 있다. 일본이나 멀리 유럽에서도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울 펜쇼를 보기 위해 대한민국을 찾아온다. 그는 만년필을 사랑하는 지구인들에게 유명한 사람이다.

 이 책 속에는 감동적인 이야기 한 편이 있다. 몇 년 전에 한 사람이 만년필연구소를 찾아왔다. 그의 누나가 회사 노래자랑에서 상품으로 받아서 쓰다 물려준 낡은 파커21을 수리하러 온 것이다. 그는 이미 돌아가신 누나가 물려준 만년필을 애지중지하며 사용해왔다. 그런데 저자가 파커21 만년필을 수리하려고 보니까, 가짜였다. 누나도 진품 파커21로 알고 있었고, 수리를 부탁하러 온 사람도 그렇게 믿고 평생 사용해온 만년필이었다. 저자는 파커21이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람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끔하게 수리해주었다.

 글씨가 잘 써지는 만년필을 받아든 그 사람의 표정은 저자가 지금도 잊지 못할 정도로 환했다고 한다. 저자가 고친 것은 단순한 만년필이 아니었다. 만년필에 얽힌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게 해준 것이다.

 이 책은 만년필을 통해 본 역사적 사건과 인간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해준다. 펜촉이 살짝 드러나 있어 답답해 보이는 파커51이 아이젠하워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항복 문서를 받아낼 때 서명한 만년필이라는 사실을 비롯해서 많은 만년필의 탄생과 역사를 들려준다.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낡은 만년필을 다시 꺼내 보고 싶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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