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책방 23> 경남의 독립운동, 그 현장과 운동가들

  <김해책방 23>
 경남의 독립운동, 그 현장과 운동가들
 김두천 외 지음 / 선인 / 308p / 1만 5천 원

 

김해시는 올해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 김해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나야 할 사업이다. 그리고 100주년 기념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내내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제의 야욕으로 짓밟히는 조국에서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일어섰던 백성들을 생각하면,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장도 뜨거워진다.

 김해를 비롯한 경남의 독립운동 역사를 담은 책을 소개한다. 언젠가는 김해의 독립운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책이 나올 것을 기대하며, 이 글에서는 김해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 한다.
 100년 전을 생각해보자. 오늘날은 스마트폰 하나만으로도 온갖 정보를 알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어디서 모이자”는 소식 하나 전하는 것에도 목숨을 걸었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도 전국에서 다발적으로, 김해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배동석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를 다니던 중 학생대표로 3·1운동에 참가했다. 민족대표 이갑성 열사의 지시로 경남지역 주요 인물을 독립운동에 참여시켰다. 또한 김해와 처가인 함안을 비롯해 경남지역에 만세운동을 확산시켰다.

 배동석은 1919년 2월 26일 마산에 내려와 박순천에게 독립선언문을 전달했고,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만세운동에서 학생대표로 활약했다. 그는 다시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김해로 내려와 임학찬, 배덕수 등과 만세시위를 의논했다. 3월 30일 김해 읍내 중앙거리에서 열린 만세시위를 주도했는데, 이는 김해 최초의 만세시위로 김해사람들의 의기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배동석은 서대문감옥에 복역하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중병을 얻었으며, 병보석으로 나와 치료를 받다가 1924년 사망했다.

 김해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난 만세운동은 장유에서였다. 1919년 4월 12일 무계리 장터에 모인 김해 사람들은 3천 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의 무력 진압에 분노해 헌병주재소를 습격했고, 일제의 총탄에 김선오 손영조 김용이 등이 순국했다. 부산 동래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한 동래고보 학생대표 고영건과 3학년생 서진령도 김해사람이다.

 전남 목포에서 4월 8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을 이끈 핵심인물 배치문 역시 김해사람이다. 배치문은 1890년 김해군 한림면 어은마을에서 배익화 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향리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906년 김해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09년 가족이 전남 목포로 이주했다. 1919년 배치문은 남궁혁·오도곤 등 지역 학생들, 서상봉 등의 유지들과 함께 목포의 만세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3.1운동 이후에는 의열단과 신간회 등을 통해 목포 지역에서 노동·사회주의·언론 영역 등의 분야를 이끌며 항일독립 활동을 계속 했다.

 김해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등재된 배치문 의사의 본적은 전남 목포로 돼있다. 배치문 의사에 관한 연구 역시 목포의 권도균 씨를 중심으로 목포에서 더 활발하다. 배치문 의사의 고향을 찾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후손도 김해에, 배치문의사기적비도 김해에 있다. 김해에서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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