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용 가야스토리텔링협회장

박경용 가야스토리텔링협회장

강수는 가야의 어느 강변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앞으로는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강변 저쪽은 절벽을 이룬 바위가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집 뒤로는 수려한 산세에다 들짐승과 새들이 많이 서식하였다.
 강수는 자연의 아름다운 속에서 자라면 들꽃, 나비, 새들과 친구가 되어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강수의 어머니는 임신했을 때 머리에 뿔이 난 아이를 낳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강수라고 했다고 한다.


 강수는 점점 자람에 따라 머리가 영특했으며 먼 친척이 중국 사신으로 오가며 가져온 책을 어깨너머로 읽으며 깨우쳐 나갔다. 강수는 깊은 사색에 빠지고 글을 쓰는 등 어릴 적부터 남다른 문장수업을 하였다.


 어느 날 강수의 글을 읽은 친척은 깜짝 놀랐다. 비범한 그의 재능에 감탄한 그는 의도적으로 중국의 책들을 가져와 강수에게 전해 주곤 했다. 그러다가 강수는 건넛마을 대장장이의 딸과 정분을 맺고 결혼하였다. 강수는  그 이후 천하의 문장가로 서서히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강수가 시를 지으면 선비들이 감동을 하고 시와 노래, 춤을 즐겨하는 가야 사람들은 강수의 글을 읽고 외우기를 좋아하였으며 가야금 연주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였다.


 드디어 임금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집안에서는 궁중에서 일을 하게 되었으니 낮은 신분 출신 아내는 강수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므로 신분이 높은 집안 여자와 다시 결혼하기를 권유했다. 강수는 가난하고 못 배운 것이 수치도 아니고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음에 부끄러움이라고 했으며 조강지처를 버리는건 배운 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세월이 흘러 나라가 기울어져서 신라에 합병되었다. 강수는 나라의 부름에 의해 계림(경주)으로 이사를 갔다. 강수는 두고온 고향 마을의 수려한 강의 경관을 늘 그리워하며 글을 쓰곤 하였다.
 그는 언제나 그러했듯 청빈하고 정직하게 살아갔다. 강수는 사람이 너무 부유하면 정신이 썩기 쉽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아내는 남편의 뜻에 따라 기꺼이 검소한 살림을 꾸려 갔다.


 그 당시 가야의 문인이나 화가, 음악가, 무용수들이 소위 신라의 문화계로 편입되었는데, 기존의 신라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런 과정에서 신라의 선비들이 강수와 문장을 겨뤄 보기로 하고 시구를 주고 받았는데 강수의 문장력은 늘 월등하였다. 그러나 훗날 가야 출신 악성 우륵도 신라 음악인들에 의해 질투와 견제를 받아 결국 국원(충주)에 안치, 행동 반경에 제한 받았듯이 강수도 많은 제재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궁중에서 중국 황제의 글을 받았는데 해석하기가 어려운 대목이 있었다. 방대한 중국의 산해경 속에 고사의 어느 한 부분을 인용하여 재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어서 신라신하들이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강수에게 보였는데 즉석에서 시원하게 풀이를 하여 설명하는 것이어서 임금은 크게 기뻐하였다. 거기다 명문으로 답장을 만들어 보내게 되었는데 중국으로부터 격찬의 반응이 돌아왔다. 임금이나 신하들은 "역시 문화 예술이 월등했던 가야의 문장가가 다르긴 다르군." 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는 강수에 대한 견제가 한층 누그러졌다. 문무왕은 "신라의 통일 위업은 두 사람의 공이 크다. 무로는 김유신, 문으로는 강수다"라고 하였다.


 강수는 직위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청빈한 삶을 이어갔다. 세월이 흘러 강수는 죽고 궁중에서 그간의 공적을 감안하여 곡식 1백석을 내려 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부인은 그렇게 많은 재물을 가지면 정신이 흐리기 쉽다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사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계림에서 남편이 그토록 그리던 고향 마을로 내려갔다.


 사람들은 문호의 아내는 다르구나 하면서 존경의 눈으로 보았다고 한다. 지금도 강수의 고향 강물은 역사를 뒤로한 채 가야 문호의 마음처럼 느긋하고 유장하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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