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선비문화(6)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

 김해 함허정은 조선 초 이고장을 중심으로 많은 문사(文士)들의 회합과 풍류를 연살케하는 유적지로서 당시 외부에서 공무로 오는 관리들의 객사(客舍)로도 이용했던 유적지다. 이 정자는 김해도호부사로 재직하던 최윤신이 지었다. 완공 후 '함허정'이라는 이름을 좌의정을 지낸 어세겸(魚世謙·1430~1500)이 지었다.

 그 뜻은 하늘이 빠진 연못이라는 의미로 경관이 매우 빼어난 인공 섬을 만들어  분산서 내려오는 호계(虎溪)천의 물을 끌어들여 연자루를 짓고 정자를 지었다. 기문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지었다. 최부사는 김일손과 친분이 두터워 그로인한 피화를 입어 사후 유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는 최부사의 아들 한성부윤공 최담이 함안 신인면에 있는 가산을 정리하여 처향인 광산노씨 집성촌인  고성 구만면으로 이거했다고 한다. 탁영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인으로 무오사화에 희생된 청도 사림 선비다. 탁영의 조카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1479~1551)는 칠원 현감을 지낸바 있으나 곧 고향 청도에 은거하여 학문과 수양으로 일관하며 지냈다.

 그는 탁영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명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평소 남명과는 절친한 사이다. 그가 운명하면서 남명이 곤궁하게 사는 것을 염려하여 아들에게  해마다 곡식을 보내주라고 명했으나, 남명은 받지 않았다. 남명은 탁영을 보고 "살아서는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凌霜之節)가 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다"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두 사람 사이 왕래한 시문이 남명집에 다수 남아있다.

 현재 함허정에는 석조 구조만 남아있고 그 자리에 '연화사'라는 사찰이 지나간 흔적을 메워주고 있다. 남명은 함허정에서 5일간 문사들과 지내며 '함허정' 시를 남겼으니 다음과 같다.

            신기루처럼 생긴 교룡의 집 들보엔 제비가 없는데
            허공을 머금은 채 곧고 바름을 본다.
            남쪽에 이름 난 크고 좋은 집이요,
            늙은 용 북쪽을 맡아 바람과 서리 많도다.
            우애 좋던 집엔 풍악 소리도 그쳤고,
            서왕모(西王母)의 못가엔 은하수가 서늘하네.
            쓸쓸한 생애는 줄어든 차가운 물과 같기에,
            한을 묻어 버리고자 잔 길게 끌어당긴다.
 
                   신등교옥연무량
                   허개함래견직방
                   걸각전남만호대
                   노규분붕잉풍상
                   당화관리생가인
                   왕모지변하한량
                   잔락생애한낙수
                   욕장매한인배장


 이 시에서 남명은 한때 많은 선비들이 출입하여 시문을 논하고 읊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제는 최부사도 김일손도 없는 세상에 허전한 마음을 달래보며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만난 친구들을 서왕모에 비유하면서 지금은 먼곳 은하수 하늘나라의 신선을 만나고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지은 시라고 본다. '서왕모'는 주나라 목왕(穆王)이 곤륜산(崑崙山)에서 만나고, 한나라 무제(武帝)도 요지(瑤地)에서 만난 적이 있는 고대 전설속의 신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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