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선비문화를 찾아서 (5)

 선생이 산해정에 있을 때 어느날 한 스님이 와서 만나서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으니 “삼각산에서 왔습니다”고 답하였다. 삼각산이라면 선생이 20대 초반 한양에서 살았으므로 반갑게 맞이하며 환대하였다. 스님은 하루 종일 머물다가 저녁 무렵 하직인사를 하고 갔다. 그 다음날 일찍 스님은 다시 와서  지내다가 헤여지기를 삼일 째 된 아침에 마지막 하직 인사를 하면서 말하기를 "소승은 전에 살던 산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고는 시축(詩軸)을 내 밀면서 절구 한 수를 청했다. 선생은 오래 전에 삼각산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기에, 옛날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절구(贈行脚僧)를 지었다.

 나도 한양 서쪽에 살면서
 삼각산을 오갔었지
 정녕 도로 말 부치노니
 이젠 편안히 다리를 붙여야지

 선생이 교유한 인물 중에 정유길(鄭惟吉,1515~1588)과의 교유도 보인다. 정유길에게 준 시〈贈鄭判書惟吉〉를 보면,

 그대 능히 북쪽으로 돌아가는데
 산 자고새인 나는 남쪽에 산다네
 정자를 산해라고 이름 했더니
 바다의 학이 뜰로 찾아오누나

 이 시에서 산자고새는 명종이 남명과 퇴계를 벼슬로 불러도 조정에 나오지 않자, 신하들이 이 두 사람을 산자고새에 비유하여 산에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정자를 산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높은 산에 올라가 넓은 바다를 본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며, 그 이면에는 공부를 하여 높은 식견을 갖추어 멀리 그리고 바르게 보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 정유길은 자신 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적지만 친구로 대하였다. 정유길은 일찍이 문과에 나아가 판서 벼슬을 하여 조정에 있는데 자신은 궁벽한 산촌서(김해) 정자를 짓고 학문에만 몰두하고 있는 처지를 표현한 시라고 본다.

 정유길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 난종(蘭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광필(光弼)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 복겸(福謙)이다. 어머니는 이수영(李壽永)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김상용(金尙容)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들 창연(昌衍)은 좌의정까지 올랐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그 뒤 공조좌랑·이조좌랑·중추부도사·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교리·직제학을 거쳐 1552년(명종 7) 부제학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이 때 이황과 더불어 성학(聖學)을 진흥시켜야 함을 진언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예조참판·대사간·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이황을 추천했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얼마 뒤 이조판서에 오르고 지중추부사가 되어 1567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8년(선조1) 경상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안정에 진력하였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되었다.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서예에도 능해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작품에 '한기비 韓琦碑'가 있고, 저서로 '임당유고 林塘遺稿'가 있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